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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특권 중의 특권, 주님의 기도

10월9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장 1-4절 )

초세기 교회 때 ‘주님의 기도’는 교회가 간직한 보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바칠 수 없었지요. 정식으로 교회 공동체에 가입한 사람들에게만 바칠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였기에 이 기도를 바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큰 특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신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큰 경외심과 ‘삼가 하는 마음’ 감사의 정과 더불어 바쳤습니다.

이러한 흔적은 오늘날 미사 경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사제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유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삼가 아뢰오니’, 통상적인 표현은 아닙니다만, 아 표현의 뜻은 ‘조심스런 마음으로’, ‘경건한 몸가짐으로’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건성으로, 습관적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쳤던 지난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너무나 황송한 마음으로,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너무나 행복한 마음으로, 충만한 기쁨과 더불어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비록 소박하고 간결하지만 예수님께서 설파하신 복음을 가장 명백하고 포괄적으로 집약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의 요약’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완덕의 길》에서 주님의 기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아버지’란 호칭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빠’, ‘아버지’란 호칭에 담긴 분위기는 어린아이가 사랑과 신뢰에 가득 찬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부르는 친밀한 분위기입니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가 하루 온종일 기다리던 아빠가 돌아오자마자 다이빙하듯이 아빠 품에 안겨 부르는 호칭이 ‘아빠’‘아버지’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사용된 ‘아빠’, ‘아버지’란 표현은 당시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가능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심으로서, 당신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만 이루어졌던 친자(親子)관계를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까지 확대시켜주십니다. 우리에게도 이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지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이며,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느님의 성령을 모시고 있는 징표라고 하였습니다.(로마 8장 15절, 갈라 4장 6절 참조)

‘주님의 기도’, 이제부터라도 좀 잘 바쳐봐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세 살배기 어린이가 부르듯이 신뢰심과 친밀함을 담아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겠습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보잘 것 없고 부족하지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로 변화되기를 희망하며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메시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메시아의 시대는 용서하고 용서받는 시대이며, 충만한 하느님의 구원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이기에,

그러한 용서와 용서를 통한 구원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를 하느님께 간청하면서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