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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혜안

10월5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조금만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있는 힘을 다해 어금니를 깨물어보지만 악습의 굴레를 끊지 못하고 또 다시 방황을 시작하는 알콜 중독자들, 마약환자들, 노숙자들, 정신 질환자들,이 세상 어딜 가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몇몇 출소자들… 오늘도 한 아이는 제게 “차라리 소년원에서 그냥 있을걸 그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 너무나도 엄청난 벽 앞에서 제 정신이 아닌 형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도와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큰 숙제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새천년기”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새천년기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고통받는 우리 이웃들이 얼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이웃들의 고통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이웃을 바라봄에 있어 가장 필요한 노력이 영적인 눈(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눈, 이기적인 욕망이 배제된 영혼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육적인 것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영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리 형편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지니고 다가갑니다.

“저 사람, 비록 지금은 주어진 상황이 몹시 어렵지만 어쩔 수 없는 원인이 있었을거야. 저 사람 역시 생명이 붙어있는 한 엄연히 존중받아야 할 나와 똑 같은 인간이다.”

아무리 부족해 보이고 아무리 한심스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긷든 하느님의 손길, 창조 때의 그 고귀한 품성을 볼 줄 아는 혜안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어떻게 보면 결국 예수님도 인간을 위한 존재였고, 복음도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 역시 어디 딴 하늘 아래, 딴 세상에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 안에 현존하시는 사람을 위한 하느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