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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한 삶 속에도 신비와 희망이 공존합니다!

9월17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갈릴래아 호수에서 남서 방향으로 내려가다보면, 타볼산을 만나게 되고 에스드렐론 평야로 접어듭니다.

좀 더 내려가다보면 사마리아 지방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 길가에 나인(Nain)이라는 작은 성(城)이 있었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40Km, 나자렛에서는 남동쪽으로 10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으니,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 오늘 날까지도 네인(Nein)이란 이름의 작은 마을로 남아있습니다.

‘나인’(Nain)이란 말의 의미는 원래 ‘기쁨’ ‘환희’ ‘즐거움’이었습니다. 결국 나인성은 ‘기쁨의 고을’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카파르나움을 거쳐 나인성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날은 고을 전체가 기쁨, 환희, 즐거움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울적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나인성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직 갈 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외아들이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었는데, 유족이라고는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 혼자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남편도 요절했고, 동시에 외아들마저 요절했으니, 이보다 더 기구한 인생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해도 해도 너무한 통념이 하나 있었는데, 요절을 죄에 따른 벌로 간주한 것입니다. 안그래도 남편과 아들을 잃고 슬픔이 하늘을 찌르는데, 중죄인 취급까지 당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사실 남편이 요절한 이후 어머니에게 외아들은 삶의 마지막 보루요 희망, 삶 전체였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냉랭하고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그저 아들만 바라보며 견뎌왔습니다. 그런 아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인생 역시 끝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인성을 들어설 때 마주쳤던 상황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기쁨의 고을이란 이름의 나인성은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름이 지닌 바처럼 환희로 가득 차있어야 할 나인성은 한 인간 존재의 죽음으로 인한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죽은 외아들의 관을 메고 걸어오던 사람들의 얼굴 역시 비통함과 상실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생명의 행렬이 나인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절묘하게도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나인성에서 ‘딱’ 마주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언행을 유심히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혹독한 현실 앞에, 그 누구도 입 하나 뻥긋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 과부를 위로해 달란다거나, 외아들을 되살려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자발적으로 나서신 것입니다.

그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는 한 인간 존재 앞에 예수님께서는 깊은 연민과 측은지심의 정을 느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신다거나 도움을 청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전히 당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십니다. 당신 자신의 힘으로 행동하십니다. 관으로 다가서선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고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복음 7장 14절)

예수님에 의한 죽었던 외아들의 소생 사건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 죽음조차 지배하고 주관하시는 참 메시아시며, 참 하느님이심을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 안에 이미 죽은지 오래 된 사람 조차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권능이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입증된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은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이심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죽음보다 더한 큰 슬픔에 잠긴 한 인간을 향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다가오시고, 어떻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시는 가를 세밀하게 보여준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니신 모든 능력을 오로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자비로운 소생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나인성의 과부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다양한 슬픔과 시련, 작은 죽음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한 삶 속에도 신비와 희망이 공존한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거듭 부서지고 허물어져, 한없이 비참해진다 할지라도, 그 비참함을 묵묵히 견디다보면, 또 다시 새벽이 밝아오고, 또 다시 작은 희망의 문이 살짝 열릴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