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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세상 속 동료 인간들이 겪는 희로애락은 곧 우리 교회의 희로애락이어야만 합니다!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사도 바오로의 데살로니카 1서 말씀은 오늘 우리를 거룩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데살로니카 1서 4장 3절)

어떤 사람들은 거룩함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이랄까, 더 나아가서 약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옛날 기억이 납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 안에서 누군가가 조금 거룩하게 사는 분위기를 풍기면 ‘상뚜스’라고 놀려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 여러 그룹 가운데 바리사이라는 나름 잘 나가던 그룹, 자칭 거룩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란 용어 자체가 ‘분리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 무엇으로부터의 분리이겠습니까? 죄와 우상숭배, 불결함과 이방인으로부터 분리였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은 스스로를 죄투성이인 인간들과는 철저히 분리되는, 거룩하고 고결하며 깨끗하고 무죄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종래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제한적이고 그릇된 거룩함을 날카롭게 질타하시며, 거룩함의 개념을 대폭 확장시키십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함이 더 이상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 사제들이나 레위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세리나 죄인들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선다면, 충분히 거룩한 사람이 될수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유다인들 시선으로 볼때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이방인이나 창녀들도, 두 팔 벌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 얼마든지 성인성녀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을 고스란히 전수받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함이 교회 만의 것만이 아님을, 교황이나 주교, 사제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교황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통해 명쾌히 설명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주교나 사제나 수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덕은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살아가고 각자 어디에 있든 날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고유한 증언을 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봉헌생활자입니까? 자신이 봉헌한대로 기쁘게 살아가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결혼한 사람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자기 배우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보기가 너무 민망하기도 하고, 분노가 솟아 올라, 함께 생활하시는 수녀님들과 촛불을 들러, 서울 나들이를 몇번 다녀왔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피드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체 사제요 수도자가 되서 그게 뭐하는 짓이냐? 시국이나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성당 안에서 기도 열심히 하시면서, 거룩하게 살면 좀 좋냐? 정 그러고 싶으면 사제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어라!’는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곰곰히 묵상해보니, 그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많은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존경하는 직속 상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정답이겠구나 싶어, 그분의 가르침을 찾아봤습니다.

고민고민하는 제게 교황님께서는 너무나 간단히, 단칼에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일이 곧 교회의 일입니다. 세상 속 동료 인간들이 겪는 희로애락은 곧 우리 교회의 희로애락이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으로부터 우리 교회가 분리되어, 홀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서는 절대 안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당연히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서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통치자들에게 제공할수 있는 최선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