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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랑은 중립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새 추기경들에게 하신 강론

“사랑은 중립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새 추기경들에게 하신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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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저를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이 드시어 손을 뻗어 그를 만지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0-41) 예수님의 연민! 당신께 다가오는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시고 그들의 필요에 개입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연민을 가지는 것에 대해 부끄럽지 않는 마음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머물러야 한다.”(마르 1,45)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나병환자를 고치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모세의 율법이 규정하는 소외를 떠맡으신 것입니다(레위 13,1-2, 45-46 참조). 예수님께서는 다른이의 고통을 떠맡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시고 그 값을 온전히 치루신 것입니다(이사 53,1 참조).

연민은 예수님께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도록 합니다. 소외에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말씀의 전례를 통해 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세 열쇠입니다.  소외된 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연민, 그분의 동참 의지.

소외: 모세는 나환자 문제에 대해 법적인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악의 치유가 확인될 때까지 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있어야 하고, 그들은 부정한 이들이라고 선언합니다(레위 13,1-2, 45-46 참조). 

그 고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나환자들이 겪어야 할 수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적, 사회적, 심리적, 영성적 괴로움말입니다. 그들은 단지 질병의 피해자가 아니라 죄인이라고, 천형을 받는다고 느껴야만 합니다! 마치 “아버지가 얼굴에 침을 밷어버린 자식”처럼 살아있는 죽음입니다. 

나환자들은 두려움, 멸시, 혐오뿐 아니라 이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피의 대상이 되며 사회에서 소외되고 건강한 사람들과는 따로 떨어진 외딴 곳에서 살아야 하는 추방을 맛봅니다. 만일 어느 건강한 사람이 나환자에게 가까이 간다면 엄하게 처벌로 나환자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됩니다. 

이 규정의 목적은 건강한 사람들을 지키고 바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염의 위험 요소를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소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대사제 가야파도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을 위해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라 전체가 망하는 것보다 났다.”(요한 11,50)

동참: 예수님께서는 두려움과 선입견으로 극히 제한되고 닫힌 개념을 힘있게 흔드시고 개혁하십니다. 무엇보다 그분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십니다(마태 5,17 참조). 예를 들어 파괴적인 복수동태법의 무효화를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멸시하고 단죄하는 안식의 준수를 반기시지 않는다고 선언하십니다. 죄지은 여인을 앞에 두고 그녀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세 율법의 적용을 고려하면서 자비심없이 획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열정으로부터 그녀를 구해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해 인류를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면서 그리고 하느님의 논리를 온전히 드러내면서 개혁을 이끄십니다(마태 5장 참조).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 사랑, 건강한 열정, 하느님 구원 의지에 기초를 둔 사랑의 논리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하느님은 … 모든 사람들이 구원 되기를 원하시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1티모 2,3-4)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자비이다.”(마태 12,7)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님은 나환자의 치유를 원하셨습니다. 그를 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가 공동체로 다시 들어오길 원하셨습니다.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의 지배적인 생각에 적응하지 않으시고, 전염의 결과를 걱정하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환자의 간원에 일말의 지체함도 없이, 일반적으로 상황을 탐색하기 위한 주저함도 없이 그리고 예측되는 결과에 구애됨 없이 즉시 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특히 멀리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환자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모두 하느님의 가족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야말로 어떤 사람들에게 빌미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유의 스캔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치유를 스캔들로 여기는 사람, 여하한 개방을 스캔들로 받아들이는 사람, 자신들의 생각과 정신구조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스캔들로 여기는 사람, 자신들의 관습과 의례적 정화에 부응하지 않는 여하한 쓰다듬과 부드러움을 스캔들로 여기는 폐쇄된 사람들을 고려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소외된 이들의 통합을 원하셨고 진영 밖에 있는 이들의 구원을 원하셨습니다(요한 10장 참조).

사유와 신앙에 두 개의 논리가 있습니다. 구원된 이들을 잃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과 잃은 이들을 구원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두 논리가 교차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법의 박사들은 전염된 것들을 멀리하여 위협을 제거합니다. 하느님의 논리는 그분의 자비를 통해 악을 선으로, 징벌을 구원으로, 제외를 선포로 재 통합하고 변모시키면서 끌어안고 받아들입니다.

이 두 논리가 교회 역사 전체에 놓여 있습니다. 제외하기 그리고 재통합하기. 성 바오로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마태 28,19 참조)을 실천하면서 개종한 외인들도 모세율법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로부터 스캔들이 되었으며 큰 저항과 적대를 받았습니다. 성 베드로 역시 이교인 백인대장 코르넬리오의 집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크게 비판 받았습니다(사도 10장 참조). 

예루살렘공의회 이후 교회가 취한 길은 항상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자비와 통합의 길입니다. 이것이 위험을 간과하거나 양의 무리 속으로 늑대가 들어가게 놔두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회개한 탕자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죄인의 상처를 결단과 용기로 치유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을 피동적으로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소매를 겆어부치는 것입니다. 교회의 길은 누구도 영원히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요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퍼트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길은 바로 실존의 근본적인 변방에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찾아 가기 위해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논리에 총체적으로 적응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고 환자들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옳은 이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 5,31-32)

나환자를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에게 어떤 해도 입히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그에게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를 선사하십니다. 율법을 경시하지 않고도,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율법의 정신을 심으신 인간을 존중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들을 “형님”이 되고자하는 욕심(루카 15,11-32 참조)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하루 종일 더위 아래서 일한 일꾼을 질투와 불평으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마태 20,1-16 참조).

그로 인해 사랑은 중립적일 수 없고, 냉소적일 수 없으며, 무관심하거나 미온적이거나 중간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전염시키며, 열정으로 달아오르게 하고, 위험을 감내하며 말려들게 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항상 합당하지 않고, 조건이 없으며 거저입니다(1코린 13장 참조). 사랑은 불치병에 걸린 즉 건드리면 않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바른 언어를 찾는 데 있어 창의성을 지닙니다. 이 “바른 언어를 찾는 것” … 만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의 언어입니다. 나환자의 치유를 전달하는 사랑의 언어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이 만짐의 언어를 배우면서 얼마나 많은 치유를 이루고 전할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 사랑의 선포자가 된 이는 나환자였습니다. 복음에 말씀하십니다. “그는 떠나가 일어난 일을 외치고 전했다.”(마르코 1,45)

사랑하는 새 추기경님들, 이것이 예수님의 논리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길입니다.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복음적인 용기로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것뿐 아니라, 멀리 있는 이들을 편견과 두려움없이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을 그들에게 거저 내보이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른다는 사람은 그분께서 행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1요한 2,6) 다른이들을 위한 봉사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구별하는 표징이요, 우리의 유일한 명예로움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추기경에 서임된 이날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우리가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되게 해 주시라고 전구합시다. 그분께서는 비방으로 인해 가장 먼저 소외의 아픔을 겪으셨습니다(요한 8,41 참조). 피난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마태 2,13-23 참조). 어머이신 그분께서 소외된 이들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도록 가르치십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이 우리가 부드러움에 대한 두려움을 갖습니까. 얼마 자주 부드러움과 연민에 대해 두려움을 갖습니까! 저희가 부드러움과 연민에 대해 두려움을 지니지 않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그들의 여정을 동반하는 데 있어 세상의 성과를 추구하지 않는 인내의 옷을 입혀주십시오. 저희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그분과 함께 걸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새 추기경 형제 여러분, 예수님과 우리의 어머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증거를 통해 구성된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전혀 지니지 못한 카스트의 계급 속에 고립되어 있으면서, 소외된 이들을 함께하려는 생각 없이 예수님과 같이 있으려 하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교회에 봉사하실 것을 권고합니다. 어떠한 이유로든 소외된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봉사하도록 여러분들을 권합니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은 모든 소외된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뵈옵기를 권합니다. 신앙을 잃은 사람들 혹은 자신의 신앙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진 또는 무신론자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주님은 현존하십니다. 감옥에 갇히신 주님, 병드신 주님, 실직자 주님, 박해받으시는 주님 … 영혼과 육신으로 나환자이신 주님, 차별대접 받는 주님! 우리가 소외받는 이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주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환자를 끌어안는 것에 대해 그리고 여하한 종류의 소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데 두려움을 지니지 않았던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사실 소외된 이들에 대한 복음 위에 우리의 신뢰성이 있고, 그것이 드러나며,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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