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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비의 얼굴 20

20. 이러한 맥락에서 정의와 자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정의와 자비는 두 가지 대립하는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한 실재의 두 가지 차원으로 충만한 사랑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법에 따라 법질서를 준수하는 시민 사회에서 정의는 근본 개념입니다. 또한 정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의 정의와 판관이신 하느님을 언급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정의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며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정직한 이스라엘인의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종종 정의의 본래 의미를 왜곡시키고 그 깊은 가치를 모호하게 만들어 율법주의에 이르게 합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관점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성경에서 정의가 하느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누이 율법의 준수보다 신앙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십니다. 마태오와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의문을 제기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단순히 의인들과 죄인들로 나누는 율법의 준수를 정의로 여기는 관점에 맞서시며, 죄인들을 찾아 그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는 자비의 위대한 은사를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해방 활동과 쇄신의 원천으로 여기셨기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거부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과 다른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준수한다면서 그저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가렸습니다. 율법 준수의 권유가 인간 존엄에 대한 배려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께서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호세 6,6)라는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을 언급하신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그 무엇보다도 자비가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시고 이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자비가 예수님 사명의 근본임이 드러납니다. 자비는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도전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뛰어넘으십니다. 율법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깊은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비슷한 길을 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뵙기 전까지는 율법의 의로움에 따라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필리 3,6 참조).

그리스도께 돌아서고 나서 바오로는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고,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 2,16).

의로움에 대한 바오로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바오로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신앙을 앞세우게 됩니다.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는 자비로 구원을 가져다주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죄와 그 결과에 예속되어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시편 51[50],11-1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