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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무제한적인 사랑의 계명

<무제한적인 사랑의 계명>

신앙심이 깊고 대화할 줄 아는 꽤나 열린 마음을 지닌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을 무엇입니까?”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율법 계명은 총 613개였습니다. 그 중에 248개의 계명은 적극적인 계명이었고, 나머지 365개는 소극적인 계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절대적, 강제적인 것, 무거운 계명이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권유적이고 경미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이 목숨처럼 중요시 여겼으며 앞자리에 두고 싶었던 계명은 안식일과 관련된 계명이나 할례에 관한 계명, 정결례와 관련된 계명, 단식에 관한 계명, 제례와 관련된 계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토록 목숨 걸고 강조했고 이를 어겼을 경우 가차 없는 잣대를 들이대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다가온 율법학자 질문의 요지는 무엇이겠습니까? 613개의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도가 높은 계명, 그래서 우선적으로 강조해야 하는 계명, 즉 가치나 등급이 가장 높은 계명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안식일 계명이나 할례나 정결례와 관련된 계명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웬걸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4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복합적으로 인용하며 ‘사랑의 계명’을 제1계명으로 선포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큰 계명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에 빠져 율법의 주인공이신 하느님은 뒷전이고 율법의 세칙에 목을 매다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경종을 울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던 율법주의자, 참으로 웃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객을 전도시켰습니다. 율법을 만들기 시작한 출발점이 하느님을 더 잘 섬기고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그 하느님은 저 멀리 떠나보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위해 꾸민 무대에 하느님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복잡하고 골치 아픈 수많은 율법 계명들이 인간을 옥죄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이셨기에 다시 한 번 무엇이 우선인지를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뜨뜨미지근한 사랑, 그저 그런 사랑, 허접한 사랑이 아니라 목숨 건 사랑, 열정적 사랑, 모든 에너지와 혼신의 힘을 다한 뜨거운 사랑이어야 함을 또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이웃을 향한 사랑도 종래 유다인들이 그려왔던 사랑과는 차별화됩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절친’,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의 개념은 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합니다.

물론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포함되겠습니다. 그러나 동심원은 점점 확대 됩니다. 나와 견훤지간, 적대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 이방인들, 꼴 보기 싫은 세리와 죄인들, 생활이 문란했던 사람들, 더 나아가 나를 공격하는 적들, 원수들까지 이웃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며 무제한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