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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도요안 신부 2009년 협력자 대림 피정 강의(요약)

아래의 글은 지난 2009년 11월 30일, 협력자 대림 피정 중

도요안 신부님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번에 서약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글 중 하나입니다.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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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협력자로서 가난한 나눔

금년으로 한국에 온 지 50년 되었다. 몇 년 전, 어머니 뵈러 미국에 간 이후,

오늘(2009년 11월 30일) 보문동에서 이곳 신월동 오는 게 가장 먼 여행이다(웃음).

우리 교회는 모여서 뭐 한다 하면 모두 ‘피정’이라는 타이틀을 붙인다.

그러나 참된 피정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며칠 전, 살레시오수녀회 전임 관구장이셨던 박혜자 수녀님을 만났다.

몽골에서 선교하다 잠시 한국에 들리셨다는 데, 내게 “이냐시오 영신수련 30일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냐시오 로욜라는 스페인 사람으로

바르셀로나에서 50km 떨어진 몬세라트에서 피정을 하다가 회심하고,

만레사 동굴에서 혼자 지내며 기도와 금욕생활에 전념했다.

만레사에서 겪은 체험을 책으로 엮은 게 바로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이다.

이 책은 읽으면 이해 못한다. 실천해야 한다.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의 삶에 대해

복음 위주로 묵상한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도, 돈보스코도, 모두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을 했다. 피정을 할 땐, 묵상/관상/성찰이 중요하다. 매우 소중한 시간이다.

그러기에 침묵이 필요하다.

수년 전, 도심지회를 거쳐 간 모든 사람을 파악하며 반성했다. 지회의 현주소가

그대로 드러났다. 협력자는 회전문을 드나드는 이가 아니다. 하느님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양성이 필요하며,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다니엘 샤프(유인물로 나누어 주심: 영국 살레시오 가족지에 실린 글임)처럼

글을 써 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돈보스코의 카리스마에 따라 선택된 백성이다.

모집된 백성이 아니다. 돈보스코의 어머니 맘마 말가리다는 물론, 복자 돈 루아의 어머니,

살레시오회 최초의 추기경 칼리에로의 어머니도 협력자였다. 살레시오 협력자는 은인이

아니다. 핵심적인 단체 사람들이다.

이제 내가 네 번째로 펴낸 책(「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

가톨릭출판사 간)을 중심으로 얘기하겠다. 이 책뿐 아니라 나머지 책을 쓰면서도 나는

살레시오 가족을 생각하며 썼다. 자문하고 성찰하며 쓴 글들이다.

이 책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한 가지 에피소드를 얘기해야겠다.

2004년 암수술을 해야 하는데 병원에 피가 모자라 수술을 할 수 없었다.

병원측에 “내가 먼저 수술을 받으면, 나중에 꼭 헌혈에 필요한 피를 드리겠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병원이 “땡잡았다.” 이때, 수술의 와중에 어리버리한 상태에 있던 내게

조선일보 종교 담당 기자가 찾아와 나를 인터뷰했다.

그로부터 5년 후, 평화신문에 내가 쓴 네 번째 책에 대한 소개 기사가 실린 걸 보고

그 기자가 나를 다시 찾아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현재 문화부 차장이다.

그는 대뜸 내게 “뭐에 대해 화가 나서 이 책을 썼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래, 화가 나서 썼다. 무엇보다 원시적인 칼뱅주의(기복 신앙)에 대해 화가

난다.“고 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그렇지 않은가? 유감스럽지만 가톨릭 신자들도

기복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말씀하셨듯,

‘문화가 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뭔가를 결정할 때,

그 나라의 문화가 복음보다 먼저 개입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때 프랑스의 다니엘 루 추기경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서양교회는 시냇물 속에 잠겨 있는 돌이다. 겉은 젖어 있지만, 돌을 깨뜨리고 보면

말라 있다.” 문화의 복음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복음의 길이 얼마나 좁은 길인지

드러내는 경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돈보스코의 사고방식으로 하면, 부자에게 가난한 이가 앵벌이하는 것은 오히려 부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마태 26,11)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내가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공동체 원장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한 어머니에게 다운증후군에 걸린 자식이 있었다. 전신지체장애도 심한 아이였다.

이 어머니는 아이를 온 몸으로, 온 정성으로 돌보았다.

그러나 결국 아이는 열다섯 살에 죽었다.

아이가 죽자 그 어머니의 친구들이 위로를 하러 왔다.

그들은 아들을 먼저 보낸 친구에게 “그간 고생 많았다. 이제 고생에서 해방됐으니

좀 편히 즐기며 지내거라.” 하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당황해 하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고.

그러자 엄마는 흐느끼면서 “너희는 몰라. 그 아이는 내게 거저 주는 걸 가르쳐 주었어.

그러나 이제 거저 주기보단 나를 위해 살 것 같아 슬프구나.” 하고 말하였다.

어떤 이는 거지에게 돈을 줘야 한다고 말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가난한 이는 누구인가? 내 경우, 몇 번의 수술을 하면서 다리가 편치 않을 때

나를 온 정성으로 돌봐 준 물리치료사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지루한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도 성실히 자신이 만나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 환자들이 그에게 가난한 이였을 것이다.

여러분에게 가난한 이는 여러분의 자녀일는지도 모른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우리 가족은 모두 여섯 식구였다. 2층집의 1층에 세들어 살았는데,

2층 주인집 여자가 재미없었다. 우리 사형제가 좀 시끄럽게 떠들면 위층에서 바닥을

세게 두드리며 그만 떠들라는 신호를 보내곤 했다. 주인 남자는 우릴 야단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주인이 심장병에 걸려 2개월간을 꼼짝 못하고 누워 있게 되었을 때,

우리 어머니는 그 여인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독일에서 이민 온 그들에겐 찾아오는

친구 하나 없었다. 가난한 이들이었다.

30년 전, 내가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가고 있을 때 옆 좌석에 젊은 필리핀 사람이 앉았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 보니, 그가 큰 꿈을 안고 직장을 얻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는 걸

알게 되었다. 선원으로 취직된 모양이었다. 첫 직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비행기가 몇 시간 연착하는 바람에 로마 공항에 마중 나오기로 했던 사람도 없었고,

그의 수중엔 돈 한푼도 없었다. 그는 로마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보나로 몇 시간 내에 도착해야만 했다.

다행히 나는 로마 지리에도 익숙했고, 돈도 조금 있었다.

그를 중앙 역으로 데려가 사보나행 열차표를 끊어 주었다.

그 걸로 끝이었다.

헌데 지금까지 매년 카드가 온다. 그는 지금 선장이다. (……)

* 시간이 부족해 당신이 직접 쓴 책에 나오는 ‘가난’에 대한 얘기는 못 하고 강연이 끝났음.

* 위 얘기 중 나오는 다니엘 샤프의 글도 게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