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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떠오르는 태양 앞에 티끌

떠오르는 태양 앞에 티끌

그 옛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셨던 질문,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오늘 나의 대답은 어떠한가,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부끄럽게도 크게 빗나간 대답을 했던 당대 사람들과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아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오신 구세주 예수님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헤로디아의 간계에 의해 참수된 세례자 요한의 환생이라고 답했습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구약 시대를 종결짓는 마지막 대예언자로 당대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세례자 요한이라는 등식은 정말 너무나 잘못된 대답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대로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묶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이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은 비교 한다는 것 자체가 큰 실례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과 동일시했는데, 이는 실수를 넘어 예수님께 대한 큰 죄에 해당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엘리야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엘리야, 예레미야, 양자 다 구약 시대 대예언자였습니다. 마음이 굳어질 대로 굳어진 이스라엘 백성들,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려 멀리 떠나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빨리 돌아오라고, 빨리 회개하라고 목청을 높인 대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붉게 활활 타오르는 아침 태양이신 예수님이란 존재 앞에 희미한 여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이란 크신 존재 앞에 마치도 먼저나 티끌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과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것 역시 너무나 송구스런 일이며 큰 실수를 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수제자답게 잘 대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꼭 찍어 정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우리 안에 영원히 호흡하고 계실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그분의 외아들이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느님 그분 자체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오직 하나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와 너, 즉 이 세상 인류 전체를 행복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적당히 믿고, 적당히 예를 갖추고, 가끔씩 존경심을 표하고, 적정선에서 추종하는 그런 존재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분은 끝도 없는 우리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실 요술 방망이 같은 존재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 내 존재 전체, 내 삶의 모든 것을 걸고 추종해야할 절대자이십니다.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성인이 그랬습니다. 그분에게서 예수님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의 하루 일과는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뜨거운 사랑을 이웃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껏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루 온 종일, 식사 시간과 취침시간까지 줄여가며 좁디좁은 고백소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