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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속의 가라지

내 속의 가라지

한 반가운 형제와 오랜만에 만나 이런 저런 대화를 하던 중에 조금은 거창하지만 ‘행복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 가장 행복했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가난하고 가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부모님 사랑 듬뿍 받으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던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공감했습니다. 

신학적 지식도, 수도생활에 대한 경험도 일천하던 지원자 시절, 비록 몸은 고달프고, 때로 춥고 배고프고, 다방면에 걸친 결핍된 생활이었지만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또 한 번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럭저럭, 설렁설렁, 때로 마지못해 살아가지 그때 당시처럼 마냥 설레고, 마냥 행복하고, 그렇지가 못하다는데 또 다시 한번 공감했습니다.

과연 왜 그럴까요? 결론 역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가라지’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내 인생의 밭에 가라지들이 슬슬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라지들과 맞서느라 삶의 많은 에너지들이 빠져나갔습니다. 삶의 피로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에 반비례해서 행복지수는 낮아져갔습니다.

가라지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별 것도 없으면서 ‘내가 누군데’ 하는 쓸 데 없는 자만심이었습니다. 쓸 데 없는 자존심과 우월감이었습니다. 내가 그쪽보다 나이가 많은데, 내가 세례 받은 지 벌써 30년인데, 내가 그쪽보다 수도생활을 얼마나 더 오래 했는데, 내가 이 분야에 얼마나 오래 종사했는데…

결국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어린 시절의 단순함과 순수함을 회복하는 것, 다시 초심자 시절의 열정과 첫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놔둔다. 마지막에 가서 가라지만 따로 묶어 불태워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먼저 든 생각은 섬뜩함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그냥 좀 봐주겠지만 막판에 가서 제대로 손 한번 보시겠다는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 마다 순간순간 분노하시고 강력한 처벌을 가하시는 하느님이라면 우리 가운데 과연 남아있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인내하시는 하느님,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 단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고 막차라도 타게 하시려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일일이 다 통제하신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팍팍하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아버지께서 엄격한 아버지, 단 한 치의 실수나 오차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쉽게 보복하고, 쉽게 진노하는 아버지였다면 우리가 어떻게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면 죽음인데, 돌아가면 무시무시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데, 객사하면 객사했지 어떻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는 늘 당신 두 팔을 활짝 벌리시고 우리의 돌아옴을 기다리시는 열려계시는 하느님, 늘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환대의 주님, 우리가 돌아갈 때 마다 그저 용서하시고 등 두드려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