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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존재 자체로 선물이요 희망

존재 자체로 선물이요 희망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자주 우울해집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젊은이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축 쳐져 있습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젊은이들만 그런가요? 연세 드신 분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사고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이 시대 절망과 좌절과 환멸의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럴 때 일수록, 특히 희망의 종교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일수록 희망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절망이 깊어갈수록 더 추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비행기 타고 10시간은 족히 걸리는 희망의 땅 미국일까요? 지구 반대편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위치한 희망봉에서일까요? 

그리고 그 희망은 언제 찾아야 할까요? 세월이 흐르고 흐른 먼 훗날 백년 뒤, 천년 뒤에? 우리의 젊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호호백발이 다 되어 죽음을 앞두고서?

절대 아니겠지요. 희망은 멀리서, 어느 다른 하늘 아래서 찾을 일이 절대 아닙니다. 가까운 곳에서,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내 가족들 안에서, 내 직장 안에서, 내가 소속된 공동체 안에서 찾을 일입니다. 그 희망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 만나다보면 참으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그야말로 고통덩어리입니다.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실감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아베 피에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입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 때 마다 힘차게 살아갈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사람, 비록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다할지라도 아직까지 이 세상은 살아볼만한 세상임을 알려주는 사람, 존재 자체로 선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사람이 희망입니다. 비록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다보니 갖은 상처를 주고받지만, 매일 티격태격 매순간 좌충우돌하는 피붙이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 안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인간들의 마지막 희망, 최후의 보루로 남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당신 친히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그들의 고통과 절망, 시름과 한숨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예언을 당신 생애 전체를 통해서 실현시키셨습니다.

오늘 희망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 다시 선물로 베푸시는 희망의 이 하루,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존재 자체로 그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게 할 선물이 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투신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