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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랑이 떠나간다 할지라도

사랑이 떠나간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율법을 제정한 최초의 목적은 좋은 의도에서였습니다. 하느님께 보다 큰 사랑을 드리기 위한 것,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정성을 드리는 것, 결국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경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 사랑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율법을 만든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율법학자들이 ‘사랑’은 조금도 실천하지 않고 사랑을 ‘연구’만 했습니다. 그냥 지나쳐버려도 좋은 아주 작은 것을 두고 이게 좋으니, 저게 좋으니, 몇날 몇일을 옥신각신했습니다. 그 결과 셀 수도 없고,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율법조항들을 양산해낸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만든 율법조항들이 하느님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하게 만들고, 인간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의 근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두 요약하면 단 두 글자 ‘사랑’뿐인 율법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멍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도와주시고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가장 우선적인 일은 너무나도 당연히 그 살인적인 율법을 폐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위치인 사랑으로 환원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랑의 인간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기존의 사랑과는 철저하게도 선을 긋는 참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퇴색되는 통속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항상 빛을 발하는 사랑, 오늘 내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잠시뿐인 사랑이 아니라 영속적인 사랑,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의 참된 행복과 성장과 구원을 추구하는 이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존 포웰 신부님의 견해에 따르면 사랑에는 제3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사랑은 조건적이든지 무조건적이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조건이 붙는다면 그 사랑은 거래요 교환이지 참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의 사랑, 아무런 계산도 밑그림도 없는 거저 주는 선물인 사랑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내가 오직 바라는 것 한 가지는 그대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대가 해방되고 구원되는 것입니다. 나는 바로 그것을 위해 매일 헌신하고 매일 죽어갑니다.”

오늘 이웃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런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자녀가 높은 점수를 받아오고, 매사에 규칙을 잘 지키고, 건강하여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엄친아’여서 부모를 자랑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자녀가 자라서 언젠가 부모의 든든한 보루가 되어줄 것이기에, 그 대가로 사랑을 주고 가치를 인정해줍니다. 만일 그런 모범적인 궤도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순식간에 싸늘하고 냉정하게 돌변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게임을 하는 것이지 사랑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철저하게도 조건적인 사랑, 명복뿐인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참 사랑은 조건을 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공부를 잘 하든지 못하든지 한결같이 사랑합니다. 그가 건강해도 사랑하지만 언젠가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려 그 모습이 형편없이 변해도 상관없이 사랑합니다. 그가 내게 잘해주든지 그렇지 않던지 꾸준히 사랑합니다. 언젠가 그가 나를 배신하고, 나를 떠나간다 할지라도 항구히 그를 사랑합니다.

그 참 사랑 자체이신 분께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