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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교회가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의 손발은 누가 대신할 것입니까?

3월 2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사순시기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성주간이 목전입니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이런저런 보속이나 결심을 계획했었는데, 결과가 만족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말과 생각만 앞섰지, 구체적인 실행 측면에서 너무 부끄러운 분들, 지나치게 상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성주간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만회할 수 있는 일주일입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고, 그 죽음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그럴듯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만, 결과물이 아쉬운 분들, 성주간 동안 딱 한 가지만이라도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교회가 강조하는 세 가지 측면, 기도와 단식과 자선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와 단식은 그 자체로 끝나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와 단식의 결과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신부님이 계십니다. 이제는 더이상 세상에 안계시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 가슴에 살아 숨 쉬고 계시는 분, 민주화 운동의 대부이신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1939~2003)이십니다.

총칼이 난무하던 군부독재자 시절, 모두가 숨죽이고 엎드려 지내던 혹독했던 유신 시절, 공개석상에서 긴급 조치 9호 철폐, 유신정권 종식을 크게 외치셨습니다.

5공 시절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고위층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은폐 조작된 것임을 만천하에 외쳐 6월 항쟁의 단초를 마련한 분도 김승훈 신부님이셨습니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시대, 겁에 질린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던 시대, 김승훈 신부님께서는 용기를 내셨습니다. 그로 인한 체포와 투옥, 고문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지만, 신부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민주화의 희생양을 자처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올라가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신부님께서 짧은 생애를 마감하시고 나서야 밝혀진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살아생전 신부님께서는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신부님의 장례 미사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신부님으로부터 이런 저런 물질적인 도움, 정신적인 도움,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평소 신부님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늘 없었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 수배 대상자 학생들, 가난한 노동자들이 찾아와서 손을 벌리니 돈이 남아 나지가 않았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 남의 빚보증 서준 서류만 잔뜩이고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을 하는데 가장 큰 도전은 재정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로 회의를 하다 보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분이 김승훈 신부님이었답니다.

도움은 물질적인 도움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참이던 당시 수많은 단체에서 신부님의 이름을 요청할 때 기꺼이 서명해주셨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셨습니다. 노동자들이 모임이나 집회 장소를 못 구할 때는 기꺼이 신부님께서 사목하시던 성당을 사용하도록 기꺼이 내어주곤 하셨습니다.

신부님의 미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군부독재 시절 신부님 곁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사찰하는 정보과 형사가 따라붙었는데, 신부님께서는 그들까지 살뜰히 챙기셨습니다. 정말이지 품이 넉넉한 큰 어른이셨습니다.

손톱만한 작은 나눔이나 희생도 뻥튀기처럼 부풀리기를 좋아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너무나 부끄럽게 만드시는 김승훈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처럼 소리소문없는 자선과 희생,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이요 단식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에 관여하시는데, 교회가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의 손발은 누가 대신할 것인가? 교회가 사회 문제, 그중에서도 가장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중세 교회와 다를 바 없다.”(김승훈,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