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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인공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3월 2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누군가가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명료하게 소개하는 성경 구절을 꼽으라 한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루카 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이른바 ‘탕자의 귀향’ ‘돌아온 둘 때 아들의 비유’를 선택하겠습니다.

둘째 아들의 행실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 종종 있는가 봅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받아야 할 유산을 미리 앞당겨 받는 그런…

둘째 아들은 재산을 분배 받자 마자 이게 웬떡이냐며, 멀러 멀리 떠나 갔습니다. 갑작스레 생긴 돈은 그 행방이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흥청망청 유흥비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중의 돈이 사라지자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친구들도 언제 그랬냐는듯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도움을 청해도 언제 봤냐는 얼굴입니다.

완전 상거지가 된 둘째 아들은 마침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유다인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동물, 불경스러운 동물로 여겨지던 돼지 치는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만나면 드릴 사과의 말씀을 되내이면서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저 멀리서 기진맥진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적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죄인인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 이 복음 구절의 주인공이요 주체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탕자의 귀향이라기보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 같은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탕자에만 시선을 지나치게 고정 시킵니다. 탕자가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동료 사제 한분이 이 복음 구절을 주제로 미사 강론을 하는 중이었는데, 탕자의 그릇된 행동에 필이 확 꽂혀 탕자 야단치느라 벌써 시간이 30분이나 흘렀습니다.

탕자가 돌아와야 강론이 마무리 될텐데, 안 돌아오니 다들 마음을 졸이던 중, 한 형제가 외쳤습니다.

“신부님! 음식 다 식는데, 이제 그만 탕자 돌아오게 하시죠!”

우리도 많은 경우 그릇된 행동을 한 둘 때 아들에게만 시선을 집중합니다. 그의 죄목을 나열하는데 신경을 씁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주인공이신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은 보지 못합니다.

신구약 성경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비유의 주인공이신 자비하신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