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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와 다른 한 존재를 견딘다는 것,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2월 23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인간관계 안에서 때로 본의 아니게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을 건널 때가 있습니다. 주고받은 상처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세월이 많이 흘러도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 왜 그런 처신을 했을까? 왜 그때 입을 딱 틀어막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자다가도 생각이 떠올라 이불킥을 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아, 되돌릴 수 없으니 더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런 갈등과 상처는 멀리 시드니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사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벌어지지 않습니다. 지극히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면 배우자나 연인, 형제자매, 절친한 친구, 매일 얼굴 마주하는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예의를 지키고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온종일 가까이 지내는 이웃이라 할지라도, 나와 그 사이에 일정의 완충지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생활 속 거리 두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가까이 지내다 보니 서로 다름으로 인한 고통이 당연히 발생합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처럼, 나와 다른 한 존재를 견딘다는 것,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존재로 인한 고통과 십자가는 때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우리에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가르침을 건네고 계십니다. 상호 관계가 극으로 치닫기 전에 예방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상호 관계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는 데는 일련의 과정이 있습니다. 각각 살아온 환경이나 지니게 된 가치관, 정치적 견해 차이 등등 모든 것이 다른 현실에서 너무나 당연히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 일을 해나가거나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입장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럴때는 적정한 어느 순간 딱 멈추면 좋을 텐데, 그게 또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성이 높아집니다. 화를 내고 성을 냅니다. 최악의 상황은 바로 욕설이요 폭력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바보, 멍청이라고 외칩니다. 그럴 때 상대방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멱살을 잡던지 주먹을 날릴 것입니다.

그 순간 둘 사이의 관계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살아생전 불붙는 지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이십 년 삼십 년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으셨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자상하고 인자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분은 당연히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도 절대로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온유와 사랑의 박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비결은 그치지 않는 일상적인 기도였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