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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겸손한 사람에게만 하느님 풍요로운 은총이 폭포수처럼 내릴 것입니다!

8월 3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오늘따라 예수님의 태도는 꽤나 의아합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알아서 척척 치유해주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때로 이방인, 유다인 가리지 않고 즉석에서 순식간에 소원을 들어주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많이 다르십니다. 마귀들린 딸로 인해 절박한 처지에 놓인 가나안 부인에게 던지는 말씀도 꽤나 굴욕적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그 순간 제가 그 여인이었다면 정말 빈정 상했을 것입니다. 아마 저같았으면 이렇게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아니,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사랑과 친절, 자비와 온유의 예수님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씀을 하실 수 있지? 그럼 내가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란 말인가? 그래 우리 딸 상태가 정말 위중하지만 이런 수모까지 받아가면서…난 못해!’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다릅니다. 마지막 배수진을 쳤던지,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도에 지나치는 굴욕적인 발언에도 눈 하나 꿈적하지 않고 또 한 번 크게 자신을 낮춥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의 딸을 향한 지극한 사랑, 겸손한 자세,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결국 기적을 불러오게 됩니다.

가끔씩 사람을 키우는 큰 스승님들의 제자 교육방식을 눈여겨봅니다. 때로 칭찬도 필요합니다. 당근과 격려도 필요합니다.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 더 큰 성장, 더 큰 도약을 위해, 더 큰 완성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보라는 차원에서의 자극, 채찍질도 필요한 것입니다. 더 큰 사람이 되라, 스승인 나를 넘어서라는 의미에서 혹독한 과정도 의도적으로 거치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마음이 아니셨을까요? 여인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기 위해 자극을 주신 것입니다. 더 크게 한 걸음 나아가라고 살짝 튕긴 것입니다.

 

딸의 치유는 사실 그녀가 얻은 것 가운데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더 큰 선물, 더 큰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 이 세상에서의 일회적인 치유와 회복뿐이 아니라 영원한 치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 하느님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인의 내면 안에서는 큰 도약과 성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치유자를 넘어 영혼의 치유자란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주인임을 넘어 또 다른 세상의 주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적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강한 확신뿐만 아니라 철저한 겸손의 덕이 요구됩니다.

겸손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의 처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나약함, 나 자신의 한계, 나 자신의 무능함, 나 자신의 무기력함, 죄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족한 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결국 내가 최종적으로 의지할 곳, 마지막으로 매달릴 곳은 하느님뿐이라는 진리를 확신하고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신앙의 진리가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하느님 풍요로운 은총이 폭포수처럼 내릴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