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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도 ‘서열’은 꽤 중요했던가 봅니다. 당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 같은 존재였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습니다. 장남과 차남 사이의 격차 역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가식적인 행동들이 참으로 한심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더욱 실망하신 것은 그토록 오랜 기간 계속 반복해서 특별교육까지 시킨 제자들마저도 아직 자리다툼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측근 제자들끼리, 그것도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싸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한때 야망과 출세욕으로 가득했던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의 미성숙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에브라임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들의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두 아들을 옆에 세워둔 채 그녀는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일종의 인사청탁을 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인사청탁을 하러 온 어머니가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한손에는 품질 좋은 토종꿀 한병을, 다른 손에는 잘 키운 씨암탉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오셨을 것입니다. 사실 그녀가 보인 행동은 꽤나 민망한 모습이었지만, 용서해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좋은 자리를 청탁하는 것은 야망이라기보다 강한 모성애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건설하실 새로운 왕국에 대한 헛된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적 통치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고, 그 나라가 서게 되면 물 좋은 자리, 총리 자리와 당 대표 자리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도가 보여준 모습 중에 꽤나 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24시간 동고동락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한가한 시간에 스승님께 면담을 신청하고 자신들의 속마음을 직접, 솔직히 표현하고 청했으면 차라리 나았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비겁하게도 어머니를 앞세워 간접적인 인사청탁을 시도한 것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미성숙한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복음 20장 26~28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