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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더 이상 피를 흘리는 대박해가 없는 이 시대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길은?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신심 미사]

더 이상 목이 잘리고 피를 흘리는 대박해가 없는 이 시대, 순교 영성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은, 순교자들의 후손인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중차대한 과제입니다.

나와 너무나 다른 그,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그, 해도 해도 너무한 그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인내롭게 견뎌내며 축복해주는 일이야말로 순교 영성을 생활화하는 길입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초라하고 남루한 나란 존재일지라도,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 계시고, 내 이마에 그분의 인호가 새겨져 있으니, 각별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존중하는 태도 역시 순교영성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내 인생을 보다 희망적,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내 인생에 대한 점수를 30점, 50점, 박한 점수가 아니라, 80점, 90점, 후한 점수를 주는 것도 순교영성을 사는 길입니다.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열악하고 암담한 현실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꺼이 살아내는 것 역시 순교 영성을 사는 길입니다.

남과 북으로뿐 아니라, 동과 서, 남과 여, 기성세대와 신세대로 갈라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이토록 심각한 분열과 대립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인내롭게 화해와 통합의 길을 모색하는 것도 순교 영성을 구체화하는 길입니다.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경축하며 대한민국 1호 사제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묵상합니다. 오랜 고달픈 유학 생활을 끝낸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조선 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는데, 그런 노력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신비스럽습니다.

조선 입국 즉시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축하연이나 감사패가 아니라 입국 즉시 체포와 투옥, 혹독한 매질과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꿈결조차 그리웠던 고국의 산천, 입국을 위해 그 숱한 나날들을 기다려왔던 조국인데…이제 그 고향 땅에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이라니…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박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국할 수도 있었습니다. 박해의 세월이 지나가기를 기대하면서 다른 학문을 공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입국을 뒤로 좀 미루고 중국에서 사목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의 뇌리 속에는 오직 목자 없이 길 잃고 방황하는 동포들의 고통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목자 없어 서러운 민중들 한 가운데로 투신할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길, 예정된 죽음의 길, 굶주림과 고문, 갖은 조롱과 처참함만이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제가 가고 있는 길을 반성합니다.

죽기를 작정하고 시작한 사제의 길이었습니다. 양보하고 희생하는 일은 기본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한 수도자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작은 것 하나 양보하지 못하고 티격태격하는 제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 하찮은 고통 앞에서도 세상이 끝난 듯이 불평불만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제 삶이 참으로 한심하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 김대건 신부님처럼 죽기 살기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고 평소보다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자신에 대해 죽는 ‘작은 순교’를 실천하기를 다짐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