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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6월 28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정의감으로 활활 불타오르던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760~750년 경이었습니다. 묘하게도 그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다윗왕 시절 못지않은 전성기랄까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에는 너무나도 당연히 당신이 선택한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속성상 잘 나갈 때 꼭 문제가 생깁니다. 자신의 힘으로 잘 나가는 줄 알고 기고만장합니다. 예로보암 2세 왕을 비롯한 정신 나간 측근들, 우둔한 지도자들은 잔뜩 겉멋이 들어 속병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점점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풍요로움과 세속적인 향락에 깊이 빠져들어가 헤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 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수금 소리에 되잖은 노래를 불러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를 만들어 낸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아모스 예언서 6장 4~7절)

성전 역시 타락하여 빈껍데기뿐인 허례허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돈맛을 들인 지도자들과 부자들은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가난한 백성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불의가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불의한 상황 앞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모스 예언자는 그야말로 철퇴로 뒤통수를 치듯, 마치 한 마리 사나운 사자처럼 포효하며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섬뜩한지 모릅니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나는 모든 사림이 허리에 자루 옷을 두르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가 되어…”(아모스 예언서 8장 9~10절)

아모스 예언자의 날 선 발언에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잠시 멈칫하였지만, 결코 물러선다거나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심기가 잔뜩 불편해진 그들은 슬슬 반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가 대체 뭔데? 어디 배워먹지도 못한 남유다 출신의 듣보잡, 깜도 안 되는게 나타나 요란을 떠는가냐?’며 콧방귀를 끼었습니다.

거침없이 당당한 아모스 예언자의 말이 귀에 몹시 거슬렸던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화가 잔뜩 나서 아모스를 베텔에서 쫒아냅니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아모스 예언서 안에서 마치 후렴구처럼 자주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다양한 징벌들, 재앙들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께로 돌아서지 않았음을 아쉬워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하나입니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

불의한 현실 앞에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하느님의 음성을 전하는 또 다른 아모스 예언자들이 필요한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언자는 악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정의, 불의와 관련해서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빛나며 불타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한 옥타브 높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우상을 타파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엄정함과 동정의 사람입니다.(아브라함 헤셀)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