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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도들은 맹수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불길에 휩싸여서도, 기도합니다!

6월 15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의 신앙은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지도자들의 위선적 삶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고생하고 있던 백성들은 신앙 안에서나마 위로와 힘을 얻고자 기대했지만, 성전 주변에는 위선자들이 득실거렸던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기도할 때 조차도 집중하지 못하고 인간의 칭찬을 찾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겉으로는 그럴 듯 해보였지만, 그 기도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엄청나게 요란스럽고 장황했지만, 그래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지만, 정작 하느님 앞에 그들의 기도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힐라리우스 교부의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성도들은 맹수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불길에 휩싸여서도, 바다 속 깊은 곳과 짐승의 배 속에서도 기도합니다.”

기도에는 진정성과 열정, 지극정성이 요청됩니다. 건성건성, 적당히,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듯한 어정쩡한 기도가 아니라, 때로 목숨을 건 기도, 삶 전체를 바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란 한 인간이 자신의 근원이자 시초인 하느님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몸과 마음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거룩하고 진지해야할 기도 행위에서 조차도 하느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위선자들의 대표 선수로 손꼽히는 자들이 있었으니 율법학자들이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평소에는 가만히 집에 잘 들어앉아 있다가도 기도하는 시간인 9시, 12시, 오후 3시만 되면 길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왕래가 잦는 회당 앞이나 큰 길 모퉁이에 멈춰 서서 멋들어진 폼, 거룩한 표정까지 지으며 열렬히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숨은 일도 다 보시는 예수님께서 가증스런 그 꼴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가치와 위상을 추락시키고 기도를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한 인간을 멋들어지게 포장하는 도구로 훼손시킨 위선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제대로 한방 날리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을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오 6장 6절)

공동체 전례, 하느님 백성과 함께 바치는 공적인 기도도 중요하지만 가끔씩 골방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영혼의 깊은 궁방 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있습니다.

성당이나 수도원만이 영성의 보고이며 곡창지대가 절대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 하느님과 내가 편안하게 통교할 수 있는 내 작은 독방 역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자신의 골방에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은 성당은 물론이고 이 세상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각 개인차가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하면서도 포괄적입니다. 따라서 한 가지 형태의 기도만 고수하고 거기에만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적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장엄한 공동체 전례가 더 빛나기 위해서는 거기에 참석하는 개개인의 열정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공동체와 무관한 개인기도는 자칫 고립되어 엉뚱한 방향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골방에서도 열심히 기도하지만, 똑같은 열성으로 공동체 전례가 장엄하게 거행되는 성전으로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