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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래서 중요한 것이 고통에 대한 의미 추구입니다!

5월 27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근본적으로 결핍 투성이요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 인간이기에,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이 근심 걱정이요, 진통이요, 고통입니다. 그저 아무런 고통 없기를, 무탈하고 승승장구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너무 얌체 같은 바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고 나서는, 신기하게도 그토록 극심했던 고통의 완화되고 해소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고통은 견딜만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은 기쁨으로 승화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산고(産苦)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쌓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복음 16장 21절)1

그뿐이 아닙니다. 마라톤 선수가 길고 긴 코스의 반환점을 돌고 나서 느끼는 육체적 고통을 상상을 초월합니다. 결승점을 앞두고 느끼는 신체적 피로도는 엄청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잠시 후 1등으로 골인하고 영광의 월계관을 받아쓰게 된다는 희망으로 가득 찬 기쁨과 환희의 고통입니다.

무자비한 폭력과 감금이 난무하던 군부독재 시절, 수많은 청춘들이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정을 드나드는 그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의미 있는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고통에 대한 의미 추구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 반드시 의미와 가치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지금 당장에는 파악하기 힘들겠지만, 이 참혹한 고통을 겪게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 반드시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곰곰이 따져봐도 도무지 이유를 모르는 고통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월이 필요한 고통입니다.

동료 인간들의 더 따뜻한 연대와 동반이 필요한 고통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더 집중해서 바라봐야만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는 고통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