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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진정한 떠남은 그릇된 자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5월 9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요한 복음사가는 착한 목자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착한 목자는 자신이 치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불러주는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로부터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목자입니다. 양들을 먹거리 풍성한 초지로 인도하고 맹수들로부터 보호해주는 목자입니다. 양들에게 가장 좋은 것,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선물로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항구하고 충실하게 착한 목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착한 목자가 되기 위해 무한 노력을 반복했던 헨리 나웬 신부님 역시 틈만 나면 그 어려움을 하소연했습니다.

요즘 많은 사목자들이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경향이 하나 있는데, 분노랍니다. 선배 사목자들 중에 자신을 이끌어줄 모범이 되는 사람이 없다고 분노합니다. 교우들을 바라보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는다며 분노합니다. 쉬는 교우들이 점점 증가하며 미사 참석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에 분노합니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교우들에게는 열정이나 헌신이 없다고 분노합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도 분노합니다.

그런데 사목자들은 이런 분노를 공공연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터트리지 않는답니다. 많은 경우 분노는 부드러운 말과 웃는 얼굴, 예의 바른 인사 뒤에 숨어있답니다. 억압된 분노는 점점 굳어져 사목자들의 마음과 영혼을 마비시키고 무력화시킨답니다.

일찌감치 이러한 체험을 온몸으로 경험했던 사막의 교부들은 침몰하는 배 같은 자신의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쳤고, 가까스로 그곳을 빠져나왔으며, 결국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자리는 바로 사막이라는 고독의 자리였습니다.

복잡다단한 이 시대 착한 목자로 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착한 목자로 올곧게 서기 위해서는 무한 반복의 정진과 구도가 필요합니다. 내공을 잘 닦아야 합니다. 작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 되어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 아르세니우스는 두 왕자의 후견인으로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궁전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상류 사회의 위선적이고 오만한 삶의 행태에 신물이 난 아르세니우스는 간절히 주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러자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세상을 벗어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아르세니우스는 즉시 로마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갔고, 깊숙한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뭔가 미진했던 그는 또다시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러자 다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벗어나라. 침묵하라. 늘 기도하라. 이것이야말로 행복하고 죄 없는 삶의 원천이다.”

여기서 즉시 한 가지 장벽 앞에 부딪히게 되네요. 침묵하라! 네 좋습니다. 가능합니다. 늘 기도하라. 네, 이 역시 노력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벗어나라! 주어진 여건상 벗어날 수 없는 오늘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담당하고 있는 본당이나 공동체 사도직을 두고 떠날 수 없습니다. 병들어 누워계신 ‘착한 신랑’을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그건 진정한 벗어남이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떠남은 그릇된 자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벗어남은 왜곡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본래의 나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진정한 벗어남은 객관적이고 영적인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떠남은 사랑 아닌 사랑을 버리고 참된 사랑, 영원한 사랑, 불멸의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