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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고지순한 하느님의 손길과 비천한 우리 인간의 바닥이 맞닿는 은혜로운 세족례!

4월 14일 [성주간 목요일 – 성유 축성 미사]

성삼일을 시작하는 오늘 성목요일, 심오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분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이 느껴보고 싶으실 것입니다. 좀 더 그분 가까이 다가서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 옛날 세족례를 주관하신 예수님처럼 형제들 앞에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일 년에 단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형제적 봉사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부끄럽게도 오랜 세월 동안 세족례 안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했었습니다. 특히 젊은 나이에 책임자가 되고 원장이 되고, 기고만장했을 때는 세족례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나이도 먹고 산전수전 다 겪고 난 지금…여기 이 시골에 와서야 세족례에 담긴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깨닫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결정적인 계기는? 깊이 있는 기도나 심오한 묵상의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영성 서적이나 탐구의 결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구체적, 실제적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감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이불 빨래를 낑낑대며 세탁실로 옮겨가면서, 화장실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으면서, 아이들의 잠자리를 하나하나 세팅하면서, 피정 오신 분들이 드실 한끼 식사를 지극정성으로 준비하면서, 마침내 세족례를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주님 가르침의 의도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또 다시 우리는 세족례를 거행합니다. 우리 사제들이 일 년에 한 번만 신자들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일년내내, 사시사철 무릎을 꿇겠다는 다짐과 함께 세족례를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구체적인 삶 속에서 매일의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나 사건 속에서 실제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세족례만 거행한다면 그 세족례는 그저 일회용 이벤트로 전락하고 맙니다.

세족례는 지고지순한 하느님의 손길과 비천한 우리 인간의 바닥이 맞닿는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오늘 성 목요일은 참으로 복된 밤이며 은혜로운 밤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한갓 피조물인 인간의 발을 씻어주시기 위해 허리를 굽히신 복된 밤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그 극진한 사랑, 그 한없는 겸손을 깊이 묵상하는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