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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 불행한 유다여! 아, 불쌍한 유다여!

4월 12일 [성주간 화요일]

최후의 만찬이 거행된 성목요일의 하루 전날인 수요일 밤, 유다는 제자단에서 몰래 빠져나와 수석사제들을 찾아갑니다. 행여 누군가가 볼세라 여우처럼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은밀히 원수들과 내통합니다.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합니다.

사실 유다는 스승 예수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열두사도단에 뽑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탁월한 수완을 인정하셔서 사도단 가운데서도 중책인 총무 역할까지 맡기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유다는 이토록 예수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풍성한 예수님의 은총과 자비 속에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 유다가 이제는 스승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마치 물건처럼, 종처럼 말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태연히 자신의 계획을 말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다가 원수들과 가격을 흥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적대자들은 예수님의 몸값으로 은돈 서른 닢을 유다에게 지불합니다. 유다는 스승이자 만왕의 왕 예수님을 팔아넘긴 대가로 겨우 한 명의 노예 몸값을 받았습니다.

은돈 서른 닢을 챙긴 유다의 행동을 보십시오. 너무나도 태연하게 제자단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한 식탁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 보십시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님을 팔아넘긴 당시 배반자 유다의 심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당시 유다는 사도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재정 담당은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닐 텐데,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그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만큼 신뢰가 가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유다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전도 여행에 파견되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고 치유와 구마 활동도 행하였습니다.

그러던 유다가 왜 배반을 하게 되었을까요? 유다는 세월과 더불어 그 순수하고 좋았던 첫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제자단의 모든 경제를 책임지던 유다였습니다. 때로 막대한 금액의 기부금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특별대우에도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졌습니다. 유다의 몸과 마음은 조금씩 예수님이 아니라 돈에로 기울어져만 갔습니다.

이미 돈맛을 알아버린 유다였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유다였기에 스승마저도 팔아치웁니다. 스승을 팔아넘기기 위해 스승에게 입맞춤할 정도까지 파렴치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얼마나 불쌍했던지 예로니모 성인의 이렇게 외쳤답니다.

“아, 불행한 유다여! 아, 불쌍한 유다여!”

예수님의 일을 하는 우리 교회 구성원들 역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사랑의 실천이나, 복음 선포는 뒷전인 채 돈만 밝히기 시작할 때, 물질만능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 우리 인생 역시 유다처럼 불쌍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투명성을 상실할 때, 달콤한 금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때 우리 역시 유다처럼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