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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끝까지 자기 비하의 길, 극단적 겸손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

4월 1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례 지침에 따르면, 긴 수난 복음을 봉독한 후에는 반드시 다음의 권고를 덧붙입니다. “주님의 수난기를 봉독한 다음, 경우에 따라 짧은 강론을 한다. 또한 잠깐 침묵할 수 있다.”

주님의 수난기가 길고, 따라서 봉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강론을 짧게 하거나 생략하라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의 수난기 내용 그 자체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기에, 수난기 자체가 가장 좋은 강론이기에, 강론을 생략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겟세마니 동산으로부터 시작되어 골고타 언덕에서 종료된 예수님 수난 여정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배반자 유다, 겁쟁이 헤로데, 애매한 총독 빌라도, 대사제 가야파, 겁쟁이 베드로, 그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 손수건으로 그분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결박된 그분을 채찍질하고 침 뱉고 조롱하던 군사들, 끝까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지킨 성모님과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애제자 사도 요한…

하늘이 울고 땅이 우는 성주간 우리는 그 옛날 예수님 수난 여정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깊이 성찰해볼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긴 예수님의 수난기를 들으면서 나는 과연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에 어떤 모습으로 참여했는지 곰곰이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길을 바로 내 삶으로,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나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런 부활의 적극적인 증인입니까? 아니면 그분 수난 여정의 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는 변두리 관찰자입니까?

빌라도 총독의 관저로 끌려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모욕과 수치심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총독의 병사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을 갖고 놀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가장무도회라도 벌인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긴 그들은 주황색 망토를 걸치게 했습니다. 주황색 망토는 로마 황제의 신하들이 입던 옷이었습니다. 그분의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워드렸습니다. 오른손에는 갈대를 하나 들려드렸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아주 우스꽝스럽게 만든 후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의 왕 만세!”하고 외쳤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존귀하신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들고 계시던 갈대를 빼앗아 거룩하신 그분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뱃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과 수치심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을 것입니다.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에 가슴이 벌렁거렸을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으로 내 말 한마디면 저따위 한갓 말단 병사들 순식간에 쓸어 엎어버릴 수 있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기적의 능력을 발휘해서 순식간에 결박을 풀어버리고 둘러서 있는 적대자들 한 방에 다 날려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끝내 침묵하셨습니다. 잔혹한 폭력 앞에 결코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경멸과 조롱을 깊은 침묵 속에 묵묵히 견뎌내셨습니다. 일말의 저항도 없이 끝까지 자기 비하의 길, 극단적 겸손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죄인인 인간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조롱 앞에서도 끝까지 침묵하시고 인내하시는 수난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 왕직의 참된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하느님의 왕직은 인간이 저지른 잔혹한 악 앞에서도 침묵으로 견뎌내시는 왕직입니다. 그분의 왕직은 해도 해도 너무한 인간의 조롱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며 봉사로써 인간을 다스리시는 사랑의 왕직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