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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들의 배은망덕 앞에서도 진노하시거나 징벌을 내리지 않으시는 하느님!

4월 8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유다 문화 안에서 돌을 든다는 것은 장난삼아 하는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 죽을죄를 지은 사람을 향해 명백한 살의(殺意)를 지니고 행하는 살상 행위였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몇 번이나 살기등등한 적대자들의 위협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밀어붙인 예수님의 죄명은 신성모독죄였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을 자처하고 있소.”(요한복음 10장 33절)

끝끝내 예수님 당신의 신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거부하고 무시하는 동족 유다인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는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깃든 신성은 보지 못하고 인성만 바라보았습니다.

유다인들은 눈에 보이는 본성만 알아보았지, 눈에 보이지 않은 본성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본성을 파악했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신성 모독죄는 예수님이 아니라 유다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깃든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완전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참 하느님이요 참사람이신 예수님의 신비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입니다. 수백 번 수천 번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사건입니다. 너무나도 감지덕지한 황송스런 사랑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하는 짓을 보십시오.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손에 손에 하나씩 돌을 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돌을 들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도적이며 적극적인 ‘살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이기로 마음먹고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족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배신감, 비애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진노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징벌을 내리지도 않으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에 또다시 설득하십니다. 끝까지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으십니다. 그리고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그게 아니란다.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것이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하고 마음 바꿔먹어라. 내게로 돌아오라.”며 신신당부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의 배은망덕함, 돌까지 드는 노골적인 적대감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는 예수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항상 우리들의 영혼, 우리들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순절의 막바지입니다.

신간 안내: ‘양승국 신부의 기도 맛들이기’

또다시 부끄러운 한 권의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기도와 관련해서 제게 오랜 고민거리 한 가지가 있습니다. 기도를 주제로 그럴듯하게 글도 쓰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열변을 토하기도 하지만, 정작 제 기도는 너무 부족하고 한심스럽다는 것입니다.

한없이 부끄러운 글들이지만, 일년내내 기도 안에 살아보려고 나름 발버둥친 흔적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좋은지 고민하고 계신 분들에게 미력하나마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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