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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는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3월 27일[사순 제4주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의 슬픔을 안고 끼고 애써 보듬으면서 살아가는 형제자매님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감내하고 있는 그 큰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그저 눈빛만 봐도 즉시 알수 있습니다.

어린 두 자녀를 두고 먼저 떠난 아내, 참으로 혹독한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두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한 젊은 아빠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눈빛이 놓아버리고 싶은 삶의 의지를 계속 붙들게 한답니다. 이제는 순전히 자신의 몫이 되어버린 산더미 같은 빨래며, 싱크대 설겆이 거리에서 아내의 얼굴을 본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극도의 슬픔과 고통을 말끔히 치유해주시고 위로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따라 복음 구절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따뜻한 얼굴이요, 한없이 포근한 그분의 품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탕자의 귀향에 대한 헨리 나웬식 묵상의 결론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 아들, 그리고 첫째 아들, 최종적으로 아버지, 세 인물이 공존합니다. 탕자의 귀향 스토리는 둘째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첫째 아들로 넘어가고,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끝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분위기는 참으로 따뜻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존재합니다. 죽을죄를 짓고 불안해하는 둘째 아들을 다독여주며 안심시켜주는 모습에서 너그럽고 지혜로운 한 노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주목할 부분이 두 손입니다. 두 손의 크기가 우선 다릅니다. 아들의 어깨에 닿은 왼손은 강하고 억셉니다. 마디마디에 꽤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저 만지는 데 그치지 않고 힘을 주고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반면 오른손은 어떻습니까? 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습니다. 귀부인의 손가락처럼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우아하고 다정한 분위기입니다. 손을 사뿐히 올려놓은 듯합니다.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고 있는 어머니의 손입니다. 아버지 안에는 모성과 부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면서도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한편으로는 붙잡아주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루만져주십니다.

아버지가 걸치고 계시는 큼지막한 외투 역시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색상이 따뜻하고 고운데다 큼지막합니다. 모양도 아치를 닮아서 깃들이기 좋은 환영의 공간입니다.

세상에 지친 나그네들을 쉬어가게 하는 장막처럼 보입니다. 헨리 나웬은 특별한 표현을 합니다.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머 새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 결국 아버지의 커다란 망토는 보살핌과 보호 속에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오는 한 존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극진히 환대하고 있습니까? 괜찮다 다 괜찮다며 다정히 등을 두드려주고 있습니까?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를 꽉 움켜쥐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탕자의 귀향을 감상하고 묵상하며, 나는 과연 돌아온 탕자인가? 아니면 첫째 아들인가? 파악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와 헨리 나웬은 그게 아니라고 외칩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모두 다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부단히 둘째 아들에서 첫째 아들로, 첫째 아들에서 아버지로 옮겨가고 변환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이를 꽤 먹은 헨리 나웬의 고백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노년기를 살아가는 분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갈 것입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헨리 나웬, 탕자의 귀향, 포이에마 참조)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