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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님께서는 이 시대 또 다른 순교자의 탄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 사랑의 순교자입니다!

2월 23일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극심한 투병의 고통 중에 계시던 한 자매님께서 제게 건넨 말씀이 참으로 큰 울림으로 남아있습니다. 기력이 없으셔서 목소리는 낮았지만 얼마나 힘차고 희망적인 말씀이었는지 모릅니다.

“제게 다가온 병고는 하느님 사랑을 증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제 병은 제가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영적 여정의 일부로 여립니다.”

자신의 병을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요 특전, 축복이라고 고백하는 자매님의 모습에서 진한 성덕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병고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셨던 자매님에게서 영광스런 순교자의 자취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폴리카르포 주교님의 순교 장면이 얼마나 영웅적이었으면, 당시 목격자가 상황을 세밀히 기록했고, 그 순교록이 아직도 우리 손에 남아있습니다. 그가 지상을 떠나가는 마지막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끔찍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강심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부들부들 떨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깊은 신앙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얼굴이 사색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순교 현장에 등장한 폴리카르포 주교님의 모습은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화형의 도구인 높게 쌓아올린 장작더미를 마주했지만, 마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개선장군의 모습처럼 늘름했습니다. 머지않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리라는 기대감에 그분의 얼굴은 광채로 빛났습니다.

폴리카르포 주교님의 화형은 당시 경기장 내에서 치러진 ‘순교 이벤트’의 파이널 경기이자 메인 이벤트였습니다. 몇몇 순교자들에 대한 처형이 모두 끝난 다음, 마지막으로 폴리카르포 주교님의 순서가 잡혀 있었습니다. 화형이 시작되기 전 총독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죄인 폴리카로포! 만일 그대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한다면, 즉시 그대의 목숨을 살려줄 것이다.”

그러자 폴리카르포 주교님께서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내가 86세가 되도록 섬겨온 그분은 나의 왕이며 구세주이시고, 또 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신 그분이신데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

화형이 시작되고 나면 너무 뜨거운 나머지 어떤 죄수들은 장작더미 위에서 뛰어내려 형집행이 지연되곤 했기에, 사형집행인들은 폴리카르포 주교님을 장작더미 위에 올린 다음 끈으로 묶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대못을 몸에 박아 단단히 고정시키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주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힘드신데 괜히 고생들 하지 마시고 그대로 두십시오, 저에게 불을 견딜 힘을 주시는 주님께서는 그대들이 굳이 못을 박지 않더라도, 제가 장작더미 위에서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서 있는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신 폴리카르포 주교님께서는 두 팔을 하늘을 향해 활짝 벌리고 장엄하게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고 찬미하올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啓示)하신 성부여, 저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에 들게 하시고 성자의 수난의 잔을 같이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이날 이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진심으로 당신을 찬미합니다.”

폴리카르포 주교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멘!”하며 기도를 마치셨을 때, 사형집행인들은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습니다.

피를 흘리는 박해 시대는 지나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시대 또 다른 순교자들의 탄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사랑의 순교자, 땀의 순교자, 인내의 순교자, 용서의 순교자들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매일 우리와 한 지붕 아래 몸 붙여 살아가는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나와 다름’으로 인해 파생되는 갖은 상처나 고통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기꺼이 견뎌내는 사랑의 순교자들이 더 많이 필요로 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