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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소멸의 아름다움

2월 13일[연중 제6주일]

 

소멸의 아름다움(필립 시먼스 저, 도서출판 나무심는 사람들 출간)이란 책을 밑줄까지 그어가면서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저자는 한때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뜨기 시작하던’, 문단의 샛별이었습니다. 그러나 힘차게 비상(飛上)을 시작하던 그에게 루게릭병이란 희귀병이 찾아옵니다.

장밋빛 꿈을 접기도 전에 죽음의 그림자는 소리없이 그의 옆에 자리잡기 시작했지요. ‘살아가는 기술’을 배워야 할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는 한 순간에 ‘죽어가는 기술'(Art of dying)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서서히 다가오던 죽음의 공포, 그로 인한 좌절감이나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초췌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몰골, 그럼에도 세상은 아무런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것을 보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자신은 극심한 고통 속에 번민하고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즐기고 떠들어대고…. 그 모든 것들이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난데없이 다가온 극심한 고통’, 그 앞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저자에게 어느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막다른 길에서 만난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깨달음이었습니다.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삶의 일부이며, 결국 성장을 위한 신비’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진실로 용서하고 진실로 마음을 열면 이 세상은 문제 덩어리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라는 깨달음이 그에게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왔습니다.

저자는 행복한 삶을 위한 첫째 원리로 ‘낙법(落法) 배우기'(Learning to fall)를 제시합니다. 머지않아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사라지므로 미리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落法)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꿈의 좌절, 체력 저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 병고나 죽음 등 언제 닥칠지 모르는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미리미리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 다시 말해서 ‘인생의 낙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복팔단'(眞福八端)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영원하고 참된 행복은 이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진복판단을 인간 영혼이 완덕에 도달하기 위해 밟아야 할 여덟 계단으로 보았습니다. 이 진복팔단은 순례 길을 걸어가는 교회공동체가 올바른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결정적 방향타 역할을 수행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참된 행복’의 조건 한 가지 한 가지를 묵상하면서 제 삶을 돌아보니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여기면서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와서야 솔직히 인정하는 바이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제 자신의 한계나 무력감을 철저하게 느끼는 순간,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음을 알게 된 사면초가 순간, 막다른 골목 그 끝에 서서 괴로워하던 순간들이 오히려 은총의 순간이었음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의 순간만큼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실하게 하느님께 손을 내밀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가장 하느님과 제 자신에 대해서 솔직했던 순간, 겸손해진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현실적 불행, 그 안에는 묘하게도 진정한 행복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이 납득하기 힘든 진리를 하루라도 더 빨리 깨닫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닥으로 내려가야 올라가며, 죽어야 산다는 그 역설의 진리를 깨치는 순간,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 순간은 우리 신앙이 한 단계 비약적으로 도약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나 인간이 주는 기쁨들은 모두 순간적인 것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지며, 얻었다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일시적인 것들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행복,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죽고 우리 자신이 없어져야만 우리 존재 전체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우리가 없어지는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우리 존재 전체를 당신 영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말끔히 비워진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살아 숨쉬심으로 인해 행복한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