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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배척과 위협 앞에서 홀연히 길 떠나시는 예수님!

1월 30일[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발걸음은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지역 갈릴래아 지방을 향했고, 드디어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 이르렀습니다.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호형호제하던 사람들, 사랑했던 사람들, 고마운 인연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고향 사람들에게도 꼭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고을에서보다도 훨씬 강도 높게 복음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찮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크게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저 사람은 우리 집 건너편에 살던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삼십 년 동안 해온 일이라곤 고작 톱질이요 대패질뿐이었는데.” 하면서 도무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냉랭하면서도 완고한 고향 사람들의 태도 앞에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차근차근 친절하게 설명해도 끝끝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수용하지 않는 고향 사람들의 소극적인 자세 앞에 예수님께서는 태도를 바꾸십니다. 적극적인 강공 모드로 돌변하십니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루카 복음 4장 25~26절)

예수님의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크나큰 수모요 상처였습니다.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길길이 뛰고 이를 갈면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작당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살해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르르 예수님을 향해 몰려든 그들은 일단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몰았습니다. 소나 돼지 몰듯이 말입니다. 깎아지르는 절벽까지 예수님을 끌고 간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님을 떨어트려 추락사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지혜로움과 민첩함이 크게 돋보입니다. 하실 말씀 시원하게 다 하신 예수님, 유다인들의 속을 긁어 놓을 데로 다 긁어놓은 예수님께서는,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시고, 재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신 후 홀연히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셨지만 동족으로부터 환영은 고사하고, 협박당하고 벼랑 끝까지 내몰리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정말이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역 중에도 이런 반역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고향 나자렛 사람들의 배신과 반역 그 이면에 어떤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묵상해봤습니다. 예수님이란 인물이 자신들의 기대에 완전히 어긋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구름을 타고 내려오실 줄 알았습니다.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오실 줄 알았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바꿀 능력의 주인공으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메시아의 모습이라니! 자신들과 동고동락했던 목수의 아들입니다. 자신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꼬질꼬질 때 묻은 삶을 살아온 일개 청년의 모습입니다.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메시아의 메시지를 예수님께서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떠한 지상적 번영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무소불위의 권력이나 물질적인 부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물리치셨던 세 가지 유혹, 빵, 기적, 권세 이런 것들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지니고 있는 바람이 무엇인가 돌아봅니다. 혹시라도 그 옛날 나자렛 고향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 사명의 첫출발이 믿음이 많이 부족한 보잘것없는 동네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