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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 말의 식초보다는 꿀 한 방울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저희 수도회 창립자 돈보스코가 각별히 존경하고 흠모했던 선배 성인(聖人)이 있었으니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1567~1622)였습니다. 얼마나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며, 본받고 싶었던지, 돈보스코가 수도회를 창립할 때 수도회 이름조차 살레시오회로 정할 정도였습니다. 올해 저희 살레시오 가족들은 그의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1593년 갓 서품된 순간부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성소 여정은 범상치 않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서품과 동시에 제네바 교구 참사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서열상 교구장 다음가는 위치였습니다.

1594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샤블레라는 험한 산간 지방에 칼뱅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한 목숨 건 선교를 자청했습니다. 그가 샤블레에 최초로 도착했을 때 그곳 사람들의 냉대와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심자들의 수는 극히 미미했습니다. 칼뱅파 신자들의 집회가 끝난 예배당에서 홀로 쓸쓸히 미사를 봉헌해야만 했습니다. 도우미로 따라왔던 사촌은 2년 만에 두손 두발 다 들고 돌아갔습니다.

혹독한 시절이었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자, 칼뱅파로 넘어간 신자들을 위해 팔이 아프도록 눈물의 편지를 썼습니다.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라, 같은 내용을 쓰고 또 썼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대문 밑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는 이른바 ‘미디어 선교’를 일찌감치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그의 부단한 노력에 더해 1598년 프랑스와 사보이아 간에 이루어진 평화 협정에 힘입어 샤블레 지역의 칼뱅파들이 서서히 가톨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4만여 명에 달하는 양들이 다시금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노력에 대한 보상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1602년 35세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제네바 교구장에 착좌하게 됩니다. 알프스산맥과 안시 호수가 멋지게 어우러진 안시에 거처를 정한 그는 600여 개의 본당을 두루 다니며 사목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가 각별히 존경했던 두 성인이 있었는데, 가롤로 보로메오와 필립보 네리였습니다. 그는 그들의 빛나는 덕행을 온몸에 둘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었으며, 따뜻함과 온유함이 넘치는 착한 목자로 거듭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부드럽고 달콤한 품성의 소유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을 각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큰 환영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모습과 삶에 홀딱 반하고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까지 나 돌 정도였습니다.

“제네바의 주교님이 저렇게 선(善)하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더 선하실까?”

틈만 나면 분노하고, 여차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향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은 부드럽고 자상한 어투로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한 말의 식초보다는 꿀 한 방울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참으로 설득력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을 갈망하며,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를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그가 남긴 불멸의 명저 신심 생활 입문을 통해 영성 생활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 시각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하실 때, 초목들은 종류에 따라 각기 자기 열매를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당신 교회의 살아있는 초목인 그리스도인이 각자 자신의 품위와 신분, 성소에 따라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자기 본분을 망각한 오늘 우리를 향해 그가 남긴 권고는 참으로 뼈 때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교가 시토회 수도자처럼 봉쇄구역에 머물러 있으면 되겠습니까? 결혼한 사람이 카푸친 프란치스코 수도자처럼 재물을 포기해서야 되겠습니까? 노동자가 주어진 일은 하지 않고 성당 안에만 줄창 앉아있으면 되겠습니까? 수도자가 공동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주교처럼 여기저기 사목 방문만 다니면 되겠습니까? 그런 모습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것이며, 질서를 무너뜨리는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심은 귀족, 노동자, 왕족과 노예, 과부와 미혼녀, 기혼녀 등에 따라 각각 다른 방법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각자의 능력과 일, 직무에 알맞아야 합니다. 신심 생활은 군인들의 막사, 수공업자들의 점포, 왕족들의 궁정, 부부들의 가정에서도 활짝 꽃 피어나야 마땅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