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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12월 30일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어제 시메온 예언자에 이어 오늘 등장한 한나 여 예언자가 한평생 겪어온 고통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열여섯의 나이에 혼인한 그녀는 남편과 혼인한 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녀의 나이는 겨우 스물셋, 그때부터 60년 동안 홀로 살아왔습니다.

당시 여자로서 가장 큰 행복은 남편 잘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편에 종속되어 한평생 별 탈 없이 백년해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건강한 아들 펑펑 잘 낳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나는 정말 빵점이었습니다. 7년 만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참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가장 불행한 인생의 대표 격인 ‘청상과부’로 60년 이상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삶을 보십시오. 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큰 상급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지복직관’ 하느님의 얼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품에 안겨 계신 만왕의 왕,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에 안아 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은 기다리는 일이군요. 비록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나날이라 할지라도 그저 기다리는 일입니다. 꼬이고 꼬인 인생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풀 방법이 없어 보이는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다 할지라도 기다릴 일입니다.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고통의 정도가 극심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고통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정말 너무너무 지루하다면 기다림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우리 앞에 좋은 날을 펼쳐놓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에 백배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한나 예언자에게 하신 그대로 말입니다.

우리 모두 너나할 것 없이 희망합니다. 나이를 먹게 되면 좀 더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꿈꿉니다. 지금은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노년기에 접어들면 좀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좀 더 많이 희생하게 되고,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이 세상을 하직할 순간이 다가오면 좀 더 이타적인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한 걸음 크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아름답고 품위 있는 노인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웬걸! 많은 경우 삶은 우리 의도대로 펼쳐지지 않습니다. 기도나 영적 생활은 습관이 중요한 것이어서 젊은 시절 기도에 맛들이지 않았던 사람이 나이 든다고 저절로 기도의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젊어서 육적으로만 살았던 사람이 연세 든다고 저절로 영적인 사람으로 탈바꿈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남은 날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안하무인으로 살아가시는 분들, 극단적 자기중심주의로 살아가시는 분들, 끝까지 놓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분들, 그래서 정말이지 불행한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들 꿈꾸실 것입니다. 영적이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노년기! 그렇다면 한나 예언자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세상에 푹 빠져 삶을 허비하다가 어느 순간 영적인 삶으로 전환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충만한 영적 생활을 추구했고 그 맛을 들였습니다. 그 결과 살아생전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평생소원을 이뤘습니다.

양승국 스태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