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칼럼

사랑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기초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2월 27일[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예수님의 직제자들, 곧 12사도들은 모두 수난당하시고 십자가형에 처해진 스승님의 모범을 따라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요한 사도만은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록 요한 사도가 자연사했다 할지라도, 순교자 못지않은 영광스런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도 어김없이 순교의 기회가 찾아왔었습니다. 기원후 95년 제2의 네로 황제라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도미시아노 황제 박해 때, 요한 사도는 에페소에서 로마로 소환됩니다.

그리스도교를 등지라는 압박을 받았지만, 그에 응할 리 만무했습니다. 요한 사도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집행인은 그를 라틴문이라는 장소로 끌고 가서 200도, 300도 부글부글 끓는 초대형 기름 가마솥에 던져넣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 역시 그 옛날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활활 타오르는 불 화덕 속에 던져졌지만, 조금도 화상을 입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던 세 유다 청년들처럼 기름 가마솥 속에 던져졌지만 티끌만큼의 상처도 입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적대자들은 요한 사도를 소아시아 해안에 있는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그는 순교의 영예를 입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다 갖췄고, 순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하느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박해 앞에서도 죽지 않고 백 살 될 무렵, 달릴 곳을 다 달린 후 잠자듯이 편안하게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한 사도는 스승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은 제자로 유명합니다. 주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셨을 때나 타볼산 위의 거룩한 변모 때에도 그는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도 예수님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아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로부터 질투와 시기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향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던 제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은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자신의 동생 안드레아와 더불어 최초로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뻤던지, 처음 예수님의 거처를 찾아갔던 시각까지 기억하고 복음서에 기록합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복음 1장 39절)

마침내 주님의 수난이 시작될 때였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배반했습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주님께서 한없이 약해진 모습으로 체포된 것에 실망해 도망가버렸습니다.

다른 사도들 역시 다들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빼다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골고타 언덕 십자가 아래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같은 요한의 충성을 주님께서 눈여겨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미래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요한은 기쁜 마음으로 성모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지극한 효성으로 보살펴드렸습니다.

기원후 96년 도미시아노 황제가 암살되자 왕위에 오른 넬바 황제는 추방된 그리스도 신자들을 복권시켰는데, 요한 사도도 꿈에도 그리운 에페소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고령이었지만 유일하게 생존한 사도로서 최선을 다해 교회를 지도했습니다.

너무나 노쇠해진 요한 사도였기에 홀로 걸을 수조차 없었지만,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강론대에 섰고, “아들들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만 거듭 반복했습니다. 그가 언제든 한결같이 사랑하라는 같은 말만 반복하자, 신자들이 궁시렁궁시렁 불평불만을 터트릴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말년에 다다른 요한의 입에는 오로지 사랑이란 단어만 흘러나왔으니, 사랑의 사도라 불릴만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기초였습니다. 그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백번 천번 더 강조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