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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누군가를 기쁘게 환대하고 배려하며 동반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인지…

12월 19일 [대림 제4주일]

피정 센터에서 사목하면서 새삼 깨달은 바가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환대하고 배려하며 동반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길고 지루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들 답답해하고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도 작은 위로, 작은 기쁨이 되어드리자는 각오로 찾아오시는 분들을 기쁘게 환대하고 있습니다. 장거리 운전이 힘든 분들을 위해 단 한 분이라도 기쁘게 버스터미널까지 픽업 서비스를 해드립니다. 맺힌 사연들, 그 어디서도 털어놓기 힘든 사연들 훌훌 털어놓으시도록 기꺼이 배려하고 동반해드립니다.

꽤나 무거웠던 짐들을 훌훌 털어놓고 환한 얼굴로 돌아가시는 분들을 바라보며, 이 천 년 전 아인카림에서의 환대 장면이 제 머릿속에 겹쳐졌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까지는 직선거리로 120Km, 그나마 걷기가 나은 요르단강 옆길을 따라 우회하면 160Km, 나귀를 타고 갔을 경우 적어도 사나흘, 일주일 가까이 걸리는 여행길이었습니다.

힘겨운 여행 끝에 아인카림에 도착한 마리아였는데, 엘리사벳의 극진한 환대와 배려에 순식간에 여독이 풀렸습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 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이제 겨우 열 서너 살 먹은 소녀입니다. 더구나 정식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혼모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의 여인은 더 황당했습니다. 너무나 쑥스럽고 머쓱해서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산모인 엘리사벳의 나이는 가임연령을 넘어도 훨씬 넘어 이제 인생을 마무리지어야 할 그런 나이였는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두 분의 만남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정녕 황당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며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찬미의 송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