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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한복판에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12월 17일

 

어린 시절 성경책을 처음 펼쳤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구약성경 첫 장을 탁 펼쳤더니, 창세기 이야기들이 전개되는데, 그 양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어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읽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럼 짧은 신약 성경을 먼저 읽어야지, 하면서 마태오 복음서 첫 장을 탁 펼쳤더니, 이번에는 발음하기도 힘들고, 생소한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는데..,아무튼 어린 제게 성경은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족보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신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셨음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통상 위대한 인물의 생애를 소개하는 전기 작가들은 그의 탁월한 업적이나 고귀한 인품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의 약점이나 흑역사는 가리기 마련입니다. 자녀나 후학들의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사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조상들을 소개하면서, 수치스러운 인물들, 가문에 누를 끼친 인물들은 적당적당히 감추거나 빼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보십시오. 위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불의하게 결합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문과 전통, 순혈주의를 중시하는 유다 역사 안에 그녀들은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율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사가는 적절치 못함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한 사건의 당사자들을 족보에 넣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족보에서 지우고 싶은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놓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정한 인간 본성을 정화하기 위하여 그 본성과 혈연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병든 인간 본성을 치유하기 위하여 그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간 본성을 위로 들어 높이기 위하여 그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타마르, 밧세바 외에도 족보에 등장하는 특별한 여인이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서 보하즈를 낳고” 바로 라합입니다. 예리코의 임금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낸 정탐꾼과 사절을 죽이려고 했을 때, 라합은 그들을 자기 집 지붕에 숨겨주었습니다.

한때 라합은 유흥업에 종사하던 이방인 여인이었으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로 돌아섰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스라엘의 딸이 되었습니다. 자기 겨레보다 이스라엘을 더 사랑했고, 충실한 이스라엘의 아들이었던 살몬과 혼인합니다.

한때 우상숭배와 타락한 생활로 바닥살이를 전전했으나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 지체가 높아지고, 아리따운 시온의 딸로 변화된 라합은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 교회의 표상입니다. 거룩한 창녀!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구중궁궐 까마득히 높은 옥좌에 좌정해계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상처투성이인 꼬질꼬질한 우리네 인생사 안에 깊이 들어오셔서 자리 잡고 계십니다.

비록 오늘 부끄럽게 살아가지만 거룩한 갈망을 지닌 채, 어떻게 해서든 거듭나보려는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한복판에 하느님께서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