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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자료 , 평생양성자료

2007년 11월 11일 자신의 고향 침파이에서 시복되었다.

갈색의 도미니코 사비오 복자 세페리노 나문쿠라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내부에 많은 성인들의 성상이 모셔져 있다. 중앙 제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손길로 인해 그 발등이 반짝반짝 빛나는 성 베드로의 좌상이 있고, 바로 그 위에는 돈 보스코가 도미나코 사비오와 또 한 소년의 손을 잡고 있는 동상이 있다. 우리 살레시오 가족들은 이렇게 돈 보스코의 동상이 가장 중요하고 큰 교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대하면서, 돈 보스코의 정신과 영성이 그만큼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돈 보스코와 함께 있는 또 하나의 소년, 그가 바로 갈색의 도미나코 사비오라 불리는 세페리노 나문쿠라이다. 세페리노는 1886년 8월 26일 아르헨티나 원주민의 마지막 추장인 마누엘과 백인 여성 로사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파타고니아의 리오네그로 강변에 있는 침파이가 그가 태어난 곳이다.

당시 인디언들은 독립된 여러 부족으로 흩어져 있었으나 세페리노의 할아버지에 의해서 한 나라로 통일되었고 세페리노의 아버지 마누엘은 강력한 왕국을 형성하며 백인 개척자들과 치열한 영토 싸움을 하고 있었다.

왕자로 태어나다

세페리노가 태어나던 시절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신식 병기로 무장한 군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인디언 토벌에 나섰다. 끝까지 저항하던 마누엘은 정부군의 월등한 무기에 밀려 결국은 항복하게 된다. 그리하여 원주민들의 주거 지역은 불모지와 다름없는 삭막한 곳으로 제한받게 되고, 마누엘은 분노를 억누르며 자기 왕국의 재기와 백인들에 대한 복수의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한편 칼리에로 신부가 이끄는 살레시오 선교사들은 1876년 처음으로 아르헨티나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바로 세페리노가 살고 있던 팜파스 지역에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친다.

마누엘은 자신들이 믿고 있던 토속신이 백인의 신보다 약하기 때문에 백인들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여 ‘백인의 신’을 믿기로 결심하고,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모든 가족과 부족 전체가 세례를 받는다.

마누엘은 자기 백성과 왕국의 재건을 위해서는 인디언들도 백인들의 지식과 학문을 배우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간파한다. 그래서 아들 세페리노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보내 해군사관학교에 입학시켰지만,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세페리노는 중도에 포기한다. 그러자 마누엘은 친분이 있던 살레시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비오 9세 학교에 세페리노를 다시 입학시켜 서양 학문을 익히게 한다.

비록 열한 살의 어린 나이지만 아버지의 증오와 원한을 깊이 통감하고 있는 세페리노도 자기 백성을 다시 세우겠다는 마음 하나로 열심히 공부하여 서양 학문들을 배워 나간다. 하지만 5년 동안 살레시오 선교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마음속에 다른 열망이 불타오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도 선교사들의 모범적인 삶을 따라 사제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살레시오 기숙학교에 흐르는 가족적인 분위기는 그를 돈 보스코에게 매료당하게 하였다. 도미니코 사비오를 모델로 정하고 전혀 새로운 문화에 들어가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한 결과, 그 자신이 또 다른 도미니코 사비오가 되었다. 기도, 애덕, 매일의 의무 수행 노력과 수덕 실천에 있어서 모범생이 되었다.

하느님 왕국의 왕자로

세페리노는 서양 학문을 배워 자기 백성들을 이끌고 왕국을 재건설해서 옛날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아버지의 꿈과는 정반대의 소망이 그의 가슴에 불타오르면서 엄청난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은 그로 하여금 자기 백성들을 진정한 왕국, 하느님 나라로 이끌 사도가 되는 길로 인도하였다. 아버지의 엄청난 반대를 극복하면서 1903년 비에드마의 살레시오 신학교에 입회한 그는 그곳에서 1년 동안 라틴어를 배우고 칼리에로 주교와 함께 이탈리아로 와서 로마 프라스카티의 살레시오 신학교에 편입하였다.

이때 당시의 세페리노의 생활은 바로 도미니코 사비오와 마찬가지였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고 성덕으로 가득 찬 한 인디언 소년의 모범적인 태도는 이탈리아 신학생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특히 출신 배경의 특이함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의 시선과 매스컴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심지어 비오 10세 교황도 세페리노를 친히 만나 격려까지 했지만, 그는 이런 것들로 인해 교만에 빠지지 않고 겸손하게 모든 이들의 친근한 벗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모범적인 생활이 긴 이야기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유럽의 풍토병으로 인디언들에게는 치명적인 결핵에 걸린 것이다. 이탈리아에 온 지 불과 1년 만에 로마의 한 병원에서 열여덟 살의 나이로 하느님의 품에 안기게 되니 그때가 1905년 5월 11일.

그의 모범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퍼지면서 그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아르헨티나의 포르틴 메르세데스 성당에는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44년 세페리노의 시복시성을 위한 조사가 시작되어, 2007년 11월 11일 자신의 고향 침파이에서 시복되었다.

이렇게 하여 마지막 왕자로 인디언 왕국의 재건을 위한 한가닥 희망이었던 세페리노는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따라 하느님 왕국의 영원한 왕자가 된 것이다. 그의 기념일은 8월 26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