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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자료 , 평생양성자료

마리아 트롱가티 수녀는 2012년 11월 24일, 시복되었다. 기념일은 8월 25일이다.

성모님의 시선을 늘 느끼며 살아간 복녀 마리아 트롱카티 수녀

<살레시오가족지>를 만나며 타오른 성소의 불꽃

1892년, 이탈리아 브레시아의 한 산골 마을에 <살레시오가족지>가 도착했다. 그 마을에 있는 한 초등학교 교사가 수업이 끝날 무렵, 학생들에게 이 잡지에 실린 선교사들의 삶, 가난한 이들과 원주민의 생활, 외국의 가난한 도시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생들 가운데 눈을 반짝이며 이 이야기를 듣는 아홉 살의 소녀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마리아 트롱카티(1883~1969)였다. 어린 소녀의 가슴에 최초로 성소의 불꽃이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로 오랜 시간 기도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결국 승낙을 받고 살레시오수녀회에 입회한 것은 스물한 살이던 1904년이었다.

도움이신 마리아의 은총

첫 서원을 하고 난 다음 해인 1909년, 간호학을 공부하던 마리아 수녀는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런데 마침 마리아 수녀가 있던 니차 몬페라토 살레시오수녀회 본부를 방문한 돈 루아(복자, 돈 보스코의 첫 번째 후계자)의 도움이신 마리아 강복을 받고 깨끗이 나았다.

그 후 마리아 수녀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부터 군 병원에서 간호사로 부상당한 군인들을 돌보았다. 병원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된 1915년 여름, 큰 홍수가 나서 인근 지역 강둑이 무너졌다. 강물이 수녀원으로 밀려와 마리아 수녀가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식당을 덮쳤다. 물이 무시무시하게 불어났고 마리아 수녀는 익사하기 직전의 위급한 순간에 이르렀다. 그때 그녀는 믿음을 다해 “당신이 어머니임을 보여 주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그러고는 만일 목숨을 살려 주신다면 나환자들이 있는 선교지로 가겠다고 도움이신 마리아께 약속하였다. 성모님께서는 마리아 수녀를 기적적으로 살려 주셨고 그녀는 그 약속을 지켰다. 기적처럼 살아난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총장 수녀에게 편지로 전하면서 나환자들이 있는 곳에 선교사로 보내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선교지로 파견되기까지 7년여의 세월을 니차 본부와 나병환자 정착촌에서 간호사로 활동한다.

40세에 에콰도르 선교사로

1922년, 마침내 살레시오수녀회 카테리나 다게로 총장 수녀는 마리아 트롱카티 수녀를 에콰도르 선교사로 파견했다. 그해 11월 말, 에콰도르에 도착한 마리아 수녀는 춘치Chunchi에서 3년 동안 지내고 나서 마카스Macas의 주보이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축일이 가까운 날에 ‘수아르족’이 사는 밀림에 도착하였다. 이미 마흔세 살이었으므로 두려웠고 불안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그 가련한 원주민들에게 ‘예수님을 모셔간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는 모든 낙담을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성모님은 나의 희망이시다.”를 수없이 되뇌었다. 그 후 마리아 수녀는 밀림에서 지낸 기나긴 세월을 마리아의 모성적 시선 아래에서 살았다. 성모님께서 가까이 계시고 활발하게 일하고 계심을 느꼈던 것이다.

감응하는 사랑을 전달하며

마리아 수녀는 부족의 유일한 간호사요 외과, 정형외과, 치과는 물론 마치과 의사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그녀는 교리교사로서, 살레시오의 감응하는 사랑을 전달했다. 수아르 부족, 특히 부녀자의 삶을 좀 더 낫게 하기 위한 그녀의 헌신은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탄생이라는 큰 열매를 맺었다. 그렇게 44년간 마리아 수녀는 멘데스 대리구의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밀림의 곳곳을 누볐다. 원주민들은 마리아 트롱카티 수녀를 ‘마르데치타’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들이 ‘어머니를 사랑스럽게 부를 때의 애칭이었다.

2012년 시복

1869년, 여든여섯 살의 트롱카티 수녀는 수쿠아에서 실시하는 연피정에 참석하기 위해 소형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잠시 후, 수아르 연맹의 라디오 방송은 흥분된 어조로 긴급뉴스를 알렸다. “오늘 오전 11시에 이륙한 비행기가 고장으로 추락하였습니다. 그리고 …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 트롱카티 수녀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녀는 너른 풀밭 위에 양팔을 벌린 채 누워 있었다. 그녀의 이 마지막 모습은 마치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생을 두 팔 벌려 모든 사람을 환대했던 그녀의 삶을 요약해 주는 듯했다.

2012년 11월 24일, 시복되었다. 기념일은 8월 25일이다. 살레시오 카리스마를 생생하게 증거한 마리아 트롱카티 수녀의 삶을 본받아, 선교의 열정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헌신의 은총이 살레시오 가족의 마음을 적시길 기도한다.

마리아 트롱카티 수녀의 성모 신심에 읽힌 일화

수아르족에게 간 지 얼마 안 돼 마리아 수녀는 추장의 딸을 수술하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마리아 수녀는 부모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생각해 보세요. 수술에 필요한 도구는 하나도 없이 주머니칼 하나로 수술을 했으니까요. 성모님께서 저를 도와주셨어요. 저는 기적을 보았어요. 그 어린 소녀의 심장 가까이에 있는 총알을 꺼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 어린이는 나았어요. 도움이신 마리아와 마드레 마자렐로께 감사!”

마리아 수녀는 새로운 선교지에 갈 때마다 도움이신 마리아 메달을 땅에 묻었다. 강을 건너고 밀림을 헤쳐 나가는 위험하고 고된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성모님의 보호를 체험하였다. 성모님께서 그녀를 붙들어 주시고 강에 빠지지 않게 해 주셨던 것이다. 깊은 강물이 위협할 때에도, 수년간의 수고가 불타 잿더미로 변할 때에도, 마을에 심각한 전염병이 돌 때에도 마리아 수녀의 발걸음은 성모송과 함께 움직였다. 치료를 받으러 찾아온 환자에게도 마리아 수녀는 늘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약을 주지만, 낫게 해 주시는 분은 도움이신 성모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