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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8월 12일[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세상 괴로운 일 중에 하나가 경직되고 형식적인 회의에 참석해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자기 연민이나 자랑으로 가득한, 주제와 동떨어진 긴 강론을 듣는 것도 만만치 않게 괴롭습니다. 급기야 마음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부글댑니다. 용서가 안 될 정도입니다.

지난 세기 대 영성가 토머스 머튼 신부님(1915~1968)께서도 종종 그런 고통 앞에 직면하셨던가 봅니다. 그러나 워낙 내공이 깊은 분이어서 그런지 반응은 우리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가 길고 지루한 회의에 참석했을 때나, 별 내용도 없이 끝도 없이 늘어지는 동료 수도자의 길고 긴 강론 앞에서 취한 태도가 참으로 위트 넘칩니다.

다른 동료 수도자들은 분노로 씩씩대거나 투덜거릴 때, 그는 즉시 교회 전통 기도인 ‘예수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심호흡을 대여섯 번 반복한 다음, 콧구멍으로, 그리고 폐로 들어오는 공기의 흐름에 집중하면서, 다음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들숨),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날숨)’

오늘 복음의 주제가 용서입니다. 백번 천번 노력해도 용서가 안 되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그의 얼굴을 봐야 하고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어떤 때는 견딜만하지만, 어떤 때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듭니다.

용서가 안 되 죽을 정도로 힘들 때, 토머스 머튼 신부님이 즐겨 애용하셨던 예수기도를 한번 바쳐보시면 좋겠습니다. 들숨을 들이 마실 때는 대기 중에 현존해계시는 자비하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호흡을 합니다.

날숨을 내쉴 때는 내 안에 일곱 마리 마귀처럼 도사리고 앉아있는 그를 힘껏 몰아내는 것입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반복해서 예수기도를 바친다면, 그 어려운 용서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진심으로 이웃들을 용서한 적은 총 몇 번인가?’ 천천히 돌아보며 헤아려 봤더니 놀랍게도 열 번도 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18장 22절)

이 말씀은 결국 용서하고 말고가 아니라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눈만 뜨면 용서하라, 밥 먹듯이 용서하라, 숨 쉬듯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그 순간부터 특별한 한 가지 현상이 우리의 신심을 뒤흔듭니다.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삶 안에 끼어들어와 내 삶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늘 삶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삶이 부담스럽고 피곤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하느님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용서만이 우리가 살길이며 용서만이 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인생길이 활짝 열립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현존방식입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마음이 담긴 진실한 기도를 통해 용서의 길을 걷기 바랍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란 감옥에서 나와 이웃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탈출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나와 이웃의 손에 미래란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여 주는 일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떨치고 용감하게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