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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자료 , 평생양성자료

살레시오 신부가 된 폴란드의 왕자

복자 아우구스토 차르토리스키 신부

1883년 5월 18일, 돈 보스코는 파리 여행 중에 폴란드의 왕자 아우구스토 차르토리스키를 만났다. 그도 역시 파리를 여행 중이었는데 돈 보스코의 명성을 듣고 그가 묵고 있던 여관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 만남에서 아우구스토 왕자는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 이후, 둘 사이에는 편지가 빈번히 오갔다.

1883년이 다 끝나 가는 어느날, 아우구스토 왕자는 돈 보스코를 찾아 토리노에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엄청난 사업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고 돌아갔다. 다음해 5월 24일, 도움이신 마리아 대축일에 다시 토리노에 온 그는 인근에 있는 호텔에 머물며 매일 아침 오라토리오를 찾아와 돈 보스코가 거행하는 미사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돈 보스코를 만나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며 살레시오 회원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돈 보스코는 내심 놀랐지만 그에게 폴란드로 돌아가 왕실과 나라에 충실하라고 차분히 권유하였다.

1885년 6월에 다시 토리노에 나타난 왕자는 돈 보스코가 지도하는 피정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피정이 끝나 갈 때쯤 다시 한번 자기 성소에 대하여 돈 보스코와 상의하기에 이른다. 돈 보스코는 그의 손을 잡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처지와 가족의 입장을 생각하여 돌아갈 것을 간곡히 권하였다.

아들의 뜻을 듣고 화가 난 그의 아버지는 즉시 그를 본국으로 소환해 버렸다. 1886년 카니발 축제 때, 마르첼리나 왕비는 그를 위해서 커다란 축제를 준비하여 은근히 신부감을 고르도록 하였다. 잘 차린 음식과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많이 초대한 근사한 잔치였다. 모든 이가 그를 바라보며 환심을 사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토 왕자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시선을 거둔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젊은 왕자는 자신의 시회적이고 가족적인 의무를 저버릴 수 없어 왕국에 머물렀지만 수도자처럼 생활하였다.

제발 저를 받아 주세요.

1887년 돈 보스코의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즉시 토리노로 왔다. 그리고 제발 살레시오 회원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돈 보스코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돈 보스코는 “우리 수도회는 당신에게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차 훌륭한 통치자가 되셔야지요. 저는 지금 로마로 가는 길이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왕자도 “방해가 안 된다면 저도 그곳에 가겠습니다.”라고 먼저 나섰다. 돈 보스코가 로마에 다달았을 때 이미 그는 그곳에 도착해서 돈 보스코를 영접했다. 그리고 돈 보스코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항상 나타나 자신의 성소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냈지만 돈 보스코는 못 들은 척하였다.

왕자는 골똘히 생각한 끝에 교황을 만나 사정해 보기로 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왕자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는 “아들아, 걱정하지 말게나. 토리노로 가서 돈 보스코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자네를 살레시오 수도회에 받아들여 주길 내가 원하고 있다고 그러게.”라고 말했다. 그해 6월 13일 왕자는 돈 보스코 앞에 무릎을 꿇고 교황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였다. 돈 보스코는 감격하여 그를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군요.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지금부터 그대는 죽을 때까지 우리 회의 회원입니다.”라고 말하고 그의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아우구스토에게 폴란드에 있는 부친과의 단절은 커다란 아픔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7월 17일에 산 베니뇨 카나베세 지원소로 와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고, 일하고, 놀면서 그는 큰 행복을 느꼈다. 11월 24일에는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에서 돈 보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았다. 당시 돈 보스코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기력이 거의 없었다. 11월 24일에는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에서 돈 보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았다. 당신 돈 보스코는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기력이 거의 없었다. 예식이 끝난 후 그는 돈 보스코를 찾아갔고 “용기를 내세요. 나의 왕자님, 그대는 사제가 될 것이고 장차 폴란드를 위해서 큰일을 하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아우구스토는 곧 발살리체 수련소에서 수련을 받았는데, 얼마 후 선종한 돈 보스코의 유해가 그곳에 모셔지자 매일 돈 보스코의 무덤을 찾아가 긴 시간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동료 수련자들이 그에게 왕실에 대하여 이야기해 줄 것을 청하기라도 하면 그는 “진정한 부귀영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것이라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겸손히 말했다. 그는 모든 이들괴 친하게 지냈고, 기쁘게 순종했으며, 단순하고 명랑하게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하늘의 권좌를 택한 왕자

1888년 10월 2일 아우구스토는 돈 보스코의 후계자인 루아 신부 앞에서 정결, 순명, 청빈의 서원을 했다. 그리고 즉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모든 영예와 권세를 버리고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수도자가 된 왕자의 이야기는 폴란드는 물론이고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폴란드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토리노로 와서 소문을 확인하려 했고, 왕자를 따라 수도회에 들어오려고 물밀듯이 몰려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다는 진리가 그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있었다. 그 시기에 이미 그는 허약한 체질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병세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최선을 다해 공부하며 시험을 치르곤 했지만, 점점 쇠약해져만 가는 자신의 건강을 더 이상 숨길 숨길 수가 없었다. 장상들은 심상치 않은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그를 공기 좋은 산 레모로 옮겨 공부를 마치게 하였다.

1892년 4월 2일, 마침내 그는 사세 서품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을 청소년과 교회와 선교를 위해 봉헌하면서 첫 미사를 드렸다. 그는 건강 때문에 운동장이나 교단이나 실습장에서 청소년들에게 둘러쌓여 함께 놀아 주고, 가르치고, 교리교육을 하는 살레시오 회원이 못 되는 대신, 조용한 방에 머물면서 기도하고 자신을 봉헌하는 가운데 누구든지 친절히 맞아들이는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많은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아우구스토 신부는 1893년 부활절까지 자신의 희생과 고통을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시키는 미사를 드렸다. 마침내 4월 8일 예수님을 계속 되뇌이면서 그는 선종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5세였다.

지금 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폴란드 프셰미슬 성당에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왕자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계속 울려퍼지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4년 4월 24일, 그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복했다. 기념일은 8월 2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