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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 하느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동의 극점에 서 계신 우리의 하느님!

7월 24일[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잡초로 뒤덮인 과실 묘목 밭을 단장하기 위해 예초기를 돌리다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세달 이상을 잘 견뎌내고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 어린 나무 하나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상처나 덜렁거리는 부위를 노끈으로 정성껏 묶고, 지지대까지 하나 세워줬습니다. 사과하는 마음으로 물도 듬뿍 주었습니다.

상처 난 여린 묘목을 싸매주고 일으켜 세워주면서, 제 머리 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지난 세월 내 인생 여정 안에서 하느님께서도 내게 이렇게 똑같이 하셨겠지? 하는 생각에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더 이상 손써볼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도 ‘이제 틀렸어! 다 끝나 버렸어!’ 하고 포기하지 않으셨던 하느님, 상처입고 쓰러져 있는 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셨던 하느님, 어떻게 해서든 다시 한 번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다시 살려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던 하느님, 그런 하느님이시라는 생각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인내의 달인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도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오 복음 13장 29~30절)

공동체를 유심히 살펴보면 일생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가라지 같은 존재들, 독버섯 같은 존재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저 같았으면 눈에 띄는 족족 과감히 솎아내야 외쳤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수확 때 까지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혹시 모를 변화나 회개의 가능성, 대대적인 방향 전환이나 새 출발을 기대하며 또 다시 인내하시면서 우리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놔둔다. 마지막에 가서 가라지만 따로 묶어 불태워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섬뜩함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그냥 좀 봐주겠지만 막판에 가서 제대로 손 한번 보시겠다는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 엄청난 인내심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짓는 순간순간 마다 하느님께서 진노하시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단죄하시고, 인간의 기를 꺾어놓는다면,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의 심판 앞에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하든 그저 묵묵히 참으십니다.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력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너무나 나약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동의 극점에 서 계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도 참아내시는 분, 우리의 악행을 끝까지 견뎌내시는 분, 우리의 불효를 끝끝내 인내하시는 분, 끝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