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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7월21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시는 방식을 보면 저절로 깊은 감사의 정이 솟아납니다. 가르침의 방식이 종래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절대 잘난 체 하지 않으십니다. 자기 자랑도 하지 않으십니다. 졸린다든지 짜증나지도 않습니다.

대신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재미있고 감동적입니다. 역동적이면서도 따뜻합니다. 율법을 배우지 못한 가난한 백성들도 듣고 무릎을 칠 정도로 쉽고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청중의 상태를 고려한 눈높이 교육이 바로 예수님의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비유’라는 설교 방식을 자주 애용하셨습니다. 비유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르침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는 이스라엘 지혜교사들이나 랍비들의 비유와는 결을 달리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극히 짧고 단순했습니다. 그러나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신비를 설명하는 비유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는데, 엄청난 학식이나 지식이 요구되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결했습니다.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모호한 본질을 설명하는데 아주 적절한 수단입니다. 왜냐하면 비유는 직접적인 진술이 아니라 상상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거의 농부나 어부 등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비유들이 의도하는 실재는 언제나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런 포인트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듣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을 마음 깊이 신뢰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비유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비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비유들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천천히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오 복음 13장 3~9절)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는 씨앗 자루를 손에 들고 작년 추수 이후로 한번도 손대지 않은 채 널려 있는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립니다. 다음에 쟁기질을 합니다.

씨앗의 운명은 쟁기질이 끝난 후에 결정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에서는 아무런 수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굶주린 새들이 즉시 날아와서 쪼아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 역시 해가 떠오르면서 오래 가지 않아 메말라 죽어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덤불이 훨씬 더 빨리 자라면서 연약한 싹을 질식시켜 버리기에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라는 놀라운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 한 알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우선 작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씨앗 안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씨앗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기보다는 발아되기를,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기를, 썩어 없어지기를, 그래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