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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수님이 느끼신 연민의 마음은 잠시 스쳐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근원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습니다!

7월 6일 [연중 제 14주간 화요일]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생각해봅니다. 그 마음은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던 군중을 향해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이 아닐까요? ‘가엾은 마음’ ‘측은지심’ ‘연민의 마음’

복음서에서 가끔 발견되는 ‘하느님 마음’과 관련된 단어가 있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와 같은 구절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그냥 평범한 마음이 아니라, ‘뱃속’ ‘창자’ ‘내장’ ‘오장육부’를 지칭합니다.

‘뱃속‘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이곳은 가장 친밀하고도 강렬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강렬한 사랑과 강렬한 미움이 커가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느끼신 연민의 마음은 피상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감정도 아니었습니다. 존재의 가장 근원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다는 것은 모든 삶의 근원이 떨리고,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한 사랑의 물줄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은 부족한 인간의 머리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당신 존재 전체로, 혼신의 마음을 다해 우리 각자를 향해 연민의 마음을 보내시는 주님께 그저 송구스런 마음으로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아마도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어린 자녀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부모의 마음, 그야말로 찢어지는 마음,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의 마음, 어떻게 해서든 되살려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일 것입니다.

사흘 동안이나 굶주린 군중을 위해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 역시 그 발로는 우리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이었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기적 역시 출발점은 우리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지독한 마귀의 횡포에 시달려온 사람의 말문을 열어주심 역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측은지심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예수님의 마음에 군중을 크게 환호하고 감격하는데, 오직 한 그룹 바리사이들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삐딱하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봤습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마태오 복음 9장 34절)

세상에 반역도 이런 반역이 없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고 해방시키러 오신 예수님께, 수많은 치유와 기적을 통해 자신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계신 예수님의 능력 앞에 감사와 찬미를 드려도 부족한데, 그분을 마귀 두목 친구쯤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신성 모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잘 나간다고 자부하던 그룹이 바리사이였습니다. 속된 사람들, 죄인들과는 철저하게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상종도 하지 않던 자칭 거룩한 집단이 바리사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었으니, 지나친 우월감과 자만심으로 인해 자신들만의 틀 안에 갇혀 쇄신과 성장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쇄신과 성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규모가 엄청난 국립도서관에서만 10년 세월을 산 생쥐가 한 마리 있다고 칩시다. 도서관에 근무 중인 그 어떤 직원도 생쥐보다 더 많은 경력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생쥐가 10년간 도서관에 살았다고 해서 박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수도회에 입회를 하고 수도자로 오랜 세월 수도원 안에서 살았다고 해서 그가 자동으로 대 영성가나 성인(聖人)이 되지는 않습니다. 신앙의 쇄신과 성장을 위해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항구하게, 지속적으로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생쥐 한 마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