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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하루를 일 년처럼, 하루를 영원처럼 충만히 살아가셨습니다!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신심 미사]

짧게나마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감정이 참으로 비장했습니다. 수도회에서 이토록 좋은 배움의 기회를 주셨는데, 제 마음은 미약하지만 최선을 다해 청소년들을 위한 복음 선포에 매진해야겠다는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아마도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사제직을 준비하던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의 마음은 훨씬 더 했겠지요. 신학 과정을 통해 당신이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된 이 좋은 주님을, 어서 빨리 고국의 양떼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신학 공부를 마무리한 그는 여러 차례 입국을 시도했지만, 당시 조선 땅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었으므로 그때 마다 좌절을 반복했습니다. 그의 귀국은 자랑스럽고 영광스런 귀국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무슨 대역죄인도 아닌데, 신분도 감춘 채, 마치 간첩처럼 은밀히 다녀야했던 가시밭길 귀국이었습니다.

마치 야행성 들짐승처럼 체포의 위험을 피해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조용히 이동해야 했습니다. 혹시라도 사람들의 눈에 띌까봐 큰 길로는 못 다니고 숲이 무성한 산길로만 다녔습니다.

이동 중에 며칠씩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탈진해, 죽을 고비도 참 많이 넘겼습니다. 계속된 굶주림과 추위와 피로는 그의 건강을 극도로 악화시켰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한양에 도착했을 때, 그는 꼼짝달싹도 못할 지경이어서 2주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 지낼 정도였습니다.

꿈에 그리던 고국에 입국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환영하기 위해 몰려나온 수많은 교우도, 예쁜 꽃다발도 아니었습니다. 박해자들의 매서운 눈빛과 번득이는 칼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친의 순교, 그로 인해 혹독한 가난의 고통을 겪고 계신 모친에 대한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습니다.

겨우 건강을 회복한 그는 조선에 성직자들을 모셔오기 위한 계획을 짜고, 교우들을 모아 또 다시 상해를 향한 험난한 여행길을 떠나게 됩니다. 순풍 하루 만에 만난 엄청난 폭풍우에 종선(從船)도 떼버리고, 돛대 두 개도 베어버렸으며, 식량마저 바다로 던져버렸습니다.

돛대도, 돛도, 키도 종선도 없이 기적처럼 황해를 건너가니, 이번에는 해적들이 달려들었습니다. 기적처럼 상해에 도착한 그는 1845년 8월 17일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게 됩니다.

오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신심 미사를 봉헌하면서 큰 감사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사목적 열정으로 충만했던 사제, 그토록 깊고 확고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우리 한국 천주교회 모든 성직자들의 모델이요 이정표, 수호자요 귀감인 것에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동시에 그분과 너무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더 이상 혹독한 박해도, 생명의 위협도 없는 지극히 평화로운 이 시대, 복음 선포하기에 너무나 적절한 이 시대, 별 열정 없이, 그저 적당히 살아가는 모습이 송구스러웠습니다.

살아생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지상에서 당신이 머물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사셨습니다. 하루를 일 년처럼, 하루를 영원처럼 충만히 살아가셨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순식간에 닥쳐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의 머릿속과 마음속은 기꺼이 박해를 받고 기쁘게 순교할 각오로 가득했습니다.

착한 목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지니셨던 활활 타오르던 사목적 열정과 어린 양떼를 향한 강렬한 사목적 사랑이 오늘 우리 한국 성직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