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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6월 23일[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오늘은 돈보스코의 영적 지도자였던 성 요셉 카파소 신부님(1811~1860)의 축일입니다. 막 사제품을 받은 돈보스코는 자신의 미래를 4살 형인 그에게 맡겼습니다. 카파소 신부님은 조언을 구하러 온 돈보스코에게 지체 없이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결정하지 말고 제가 운영하고 있는 사제학교로 들어 오십시오.”

카파소 신부님은 새사제 돈보스코가 3년간 사제학교를 다니는 기간 동안, 그의 팔을 이끌고 비참한 토리노 뒷골목으로, 소년 교도소로 안내했습니다. 비록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지만 카파소 신부님은 때로 자상한 아버지처럼, 때로 우애 깊은 형처럼 돈보스코를 동반했고 격려했습니다.

3년간의 사제학교를 수료한 돈보스코는 여기저기서 들어온 좋은 제안들을 단호하게 뿌리칩니다. 그가 착취당하는 토리노 뒷골목의 청소년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정하자, 카파소 신부님은 크게 기뻐하며 물심양면으로 돈보스코를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돈보스코가 넘쳐나는 아이들이 머물 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면, 어김없이 카파소 신부님이 찾아와 조용히 큰 돈뭉치를 건네주고 갔습니다. 돈보스코의 사업이 교구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받을 때 적극 변호해주었습니다. 찾아갈 때 마다 과분할 정도로 도와준 카파소 신부님이었기에, 나중에 돈보스코는 너무 미안해서 찾아뵙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카파소 신부님은 어린 시절부터 작은 성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고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그는 유난히 키가 작고 허약한 체질이었습니다. 열 세 살 때부터는 척추 기형으로 인해 오른 쪽 어깨가 위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로 인한 꾸부정한 자세는 평생 그를 따라다닌 신체적 특징이 되었습니다.

카파소 신부님은 몸은 비록 허약했지만 탁월한 능력과 성덕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토리노 사제학교 학장에 취임합니다. 당시 신학교 교육이 꽤나 부실했기에,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3년 과정의 사제학교를 개설했는데, 카파소 신부님은 돈보스코를 비롯한 탁월한 제자들을 잘 양성시키기로 유명했습니다.

한번은 재미있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당대 저명인사가 된 카파소 신부님을 사람들은 그냥 놔두지 않았습니다. 카스텔누오보 선거구가 피에몬테 지역 국회의 하원의원으로 카파소 신부님을 지명한 것입니다.

깜짝 놀란 카파소 신부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국회의원으로서가 아니라 사제로서의 셈을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카파소 신부님은 당시 교회와 신자들을 괴롭히던 엄격주의자들의 공격 앞에서도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활짝 열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우리의 구원뿐입니다.”

카파소 신부님이 평생토록 간직했던 삶의 모토는 이렇습니다. “성덕은 특별한 일을 하는 데 있지 않고 평범한 일을 비범할 정도로 완벽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저는 사제로서 아무것도 요구하거나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카파소 신부님은 사목자로서의 자세는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항상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와 함께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위해 항상 헌신했습니다.

특히 카파소 신부님은 당시 큰 고생을 하고 있던 굴뚝 청소부 청소년들을 위한 사도직을 기쁘게 수행했습니다. 중환자와 임종자들을 사목적으로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사제들에게 강조하며 솔선수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카파소 신부님은 교도소 수감자들과 초조한 마음으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사형수들을 방문해 위로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마차에 동승해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해준 사형수의 숫자는 총 68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