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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잘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6월 14일[연중 제 11주간 월요일]

유다인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준수되어온 동태복수법은 말 마디 그대로 공격 받은 그대로 고스란히 복수하는 것입니다. 내가 피해입은 그대로 똑같이 응징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오른뺨을 한대 쳤다면 나도 똑같이 그의 오른 뺨을 한대 갈기는 것입니다. 그가 내 집에 불을 질렀다면 나도 그의 집을 찾아가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나를 고소했으면 나도 그를 맞고소하는 것입니다. 이웃나라에서 우리나라를 향해 포를 쏜다면 우리도 그들을 향해 포를 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라도 동태복수법에 따르고픈 충동과 유혹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마태오 복음 5장 39~41절)

오늘 내 발밑을 한번 돌아봅니다. 아직도 수십년 전 받은 상처에 연연해하고 있습니다. 진작 세월의 강물에 흘려보냈어야 할 사건을 부여잡고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틈만 나면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되갚아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주님은 참으로 요구가 많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역시 절대로 녹록한 삶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보천치 같은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가치관은 세상의 가치관과 맥을 달리 하는 것을 넘어 완전 반대 노선을 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잘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억울한 느낌이 든다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사랑에 대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해의 폭도 점점 확장시켜나가야겠습니다. 고전적인 율법 정신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족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만 피가 다른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그저 물리치고 배척하고 이겨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통용되고 있던 사랑의 개념을 더 크게 확장시키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시켰던 사랑의 실천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나를 박해하고 위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사랑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들의 이 자기중심적이고 편협된 사랑이 보다 더 큰 사랑, 보다 더 보편적인 사랑, 보다 더 이타적으로 신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킬 것을 당부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