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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형제적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은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6월 10일 [연중 제 10주간 목요일]

혈기왕성하던 초보 사제 시절의 부끄러운 일이 생각납니다. 양육하고 있던 아이의 보호자와 통화하던 중에, 그쪽의 너무나 무책임한 태도에 욱하는 성격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제쪽에서 포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서로 목소리가 높아졌고, 막말을 주고 받다다, 결국 건너지 말아야 할 강까지 건너고 말았습니다.

전화를 끊고나서는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에 도통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 미사를 봉헌하러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하필 복음을 봉독하는데, 글쎄 내용이 기가 막혔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오 복음 5장 23~24절)

미사 내내 예수님의 권고 말씀이 정말이지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드리는 미사는 솔직히 미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리 자주, 강력하게 용서나 화해를 강조하셨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사후 저는 큰 용기를 내서 어제 그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퍼부었던 말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부끄럽고 미성숙한 언행에 대해서만 정말 죄송하다고, 용서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순간 기적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분께 용서를 비는 순간,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 형에 처해진 예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억울한 마음도, 격렬했던 감정도 눈녹듯히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와 일상생활 속의 형제애는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제적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은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금의 봉헌금을 하느님 대전에 바친다 할지라도 이웃과 불목하고 다투고 있다면 그 예물 봉헌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대한 최소한의 의무도 소홀하면서 드리는 제사나 예물 역시 하느님께서 즐겨 받지 않으실 것이 확실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예배를 핑계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틈만 나면 다투고, 수시로 불목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헐뜯는데 혈안이 된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한 공동체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는 울리는 징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예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바치는 예배와 봉헌이 보다 가치 있고 합당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필요한 노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화해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또 다시 서로에게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백번이고 천 번이고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밥 먹듯이 이웃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