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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원불멸의 든든한 위로자, 하느님 아버지께서 굳건히 우리 뒤를 받쳐주고 계십니다!

6월 7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코린토 2서를 통해 그는 자신이 온 몸으로 체험한 하느님 아버지를 ‘인자하신 위로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2코린토 1장 3~4절)

너나할것 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우리는,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필연적으로 쉼없이 방황하고 흔들리며, 상처입고 쓰러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뎌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들 누군가로부터의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 격려와 사랑의 손길을 간절히 기대합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나 이웃들은 사실 그런 역할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잘 아는 것 처럼, 인간들 사이에서 주고 받는 위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그토록 의지했던 그, 그 숱한 위로를 선물로 주었던 그도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와 비슷한 한 가련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도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하며, 그도 나처럼 수시로 허물어지며, 언젠가 반드시 떠나갑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더 든든한 위로자, 더 영원한 위로자가 필요한데,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우리를 저버리지도 떠나가지도 않으시는 영원불멸의 든든한 위로자, 하느님 아버지께서 굳건히 우리 뒤를 받쳐주시니 말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한없이 자애롭고 부드러운 모성적 위로자 성모님께서 다가갈 때 마다 폭포수 같은 위로를 건네주십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존재였지만, 이제는 하늘의 찬란한 별이 되신 성인성녀들께서 또 다른 위로자들로 줄지어 서 계십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주변은 위로자들로 바글바글합니다.

충만한 위로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 우리가 또 다른 위로자가 되어, 온갖 환난을 겪고 있는 이웃들, 너무 외로워 속울음 울고 있는 이웃들에게 다가서야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언제 가장 큰 위로를 받았던가 돌아봤습니다.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너무 괴로워 숨조차 쉬기 힘든 상황인데, 말로만 힘내, 조금만 참아, 기도할께, 하는 말들은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무 말없이 자리를 지켜줄 때, 내 아픔에 깊이 공감해주고 고개를 끄덕여줄때, 그저 함께 힘겨운 길을 걸어줄 때, 참으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가 나보다 더 크게 아파할 때, 누군가의 더 큰 고통을 통해, 내 고통이 조금이나마 완화되고 치유되는 신기한 현상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묵상해보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숱한 고통 속에, 이런 저런 작은 죽음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로만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큰 위로 방법을 찾으셨는데, 우리보다 더 큰 고통, 더 큰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애야, 많이 고통스럽니? 그렇다면 나를 한번 보거라. 내 고통은 네 고통보다 훨씬 크단다. 지금 지고 있는 십자가 결딜 수 없을만큼 무겁니? 그렇다면 나를 보거라. 내 십자가는 훨씨 더 무겁단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