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칼럼

성령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입니다!

5월 11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사도행전에서는 초대 교회 복음 선포 여정의 최일선에서 서서 맹활약하는 바오로와 실라스의 모습이 감동깊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타락과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지내던 필리피 사람들, 아직 그리스도교에 낯설었던 필리피 군중은 연일 계속되는 바오로와 실라스의 뼈때리는 설교 앞에 분노로 몸을 떨며 우르르 몰려와 두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중은 달려들어 바오로와 실라스의 옷을 찢어 벗겼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다 큰 사람들에게 옷은 스스로 입고 벗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은 두 사람이 원치도 않았는데 강제로 마구 옷을 벗겼습니다. 그것도 그냥 벗긴 것이 아니라 찢어 벗겼습니다. 당사자 입장에서 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당혹스런 일이겠습니까?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벌떼처럼 일어난 군중은 바오로와 실라스를 매질하기 시작했는데, 매 한대 한대에 분노가 가득 담겨있었습니다. 반쯤 죽을 정도로 매질을 당한 두 사람은 가장 깊은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발에는 노예들에게나 채우던 무거운 차꼬를 채웠습니다.

어두운 지하 감옥에 내동댕이쳐진 바오로와 실라스는 혹독한 매질로 인해 여기저기 출혈이 생겼습니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습니다. 뼛속까지 난 깊은 상처로 인해 저절로 신음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제가 바오로나 실라스였으면, 옷벗김과 심한 매질로 인한 트라우마에 몸을 떨었을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크게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여야지, 이렇게까지 매질을 하다니’하면서 투덜거리고 불평불만했을 것입니다. 분노와 복수심으로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와 실라스를 보십시오. 분노나 두려움은 커녕 찬미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큰 목소리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던 다른 수인들과 간수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심한 매질로 인해 자기 한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상황인데, 저렇게 찬미가를 부르고 기도를 바치니,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큰 호기심을 가지고 두 사람의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들을 바오로와 실라스가 행했는데, 그 배경은 바로 성령의 현존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종종 그런 사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사랑의 기적을 연출해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몇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일들을 아무 것도 아닌듯 태연한 얼굴로 매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오실 때면 좋은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안갯속 같았던 우리의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만사를 제대로 볼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꽃이 피는 시절에도 기뻐하지만, 꽃이 지는 시절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막 출고된 신차처럼 건강미 철철 넘치는 젊은 시절에도 감사하지만, 노후된 중고차 처럼 여기 저기 아프고 골골할 때도 감사의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 존재지만 대자연의 순환주기와 생로병사를 큰 마음으로 수용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활동하실 때 인생사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