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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아주고 너를 도와주리라!

5월 9일 [부활 제6주일]

구약 성경 안에서 하느님께서 한 인간 존재에게 친구라고 말씀하신 적은 거의 없습니다. 오직 단 한번 하느님께서 성조(聖祖) 아브라함에게 벗이라고 칭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벗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내가 너를 땅 끝에서 데려오고 그 가장자리에서 불러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너를 내치지 않았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아주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야서 41장 8~10절)

또 다른 구절을 애써 찾아보자면 하느님께서 모세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기 33장 11절)

그만큼 구약 시대 배경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여, 감히 친구라는 개념을 적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하겠다는 것은 엄청난 가치관의 대변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15장 15절)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 정도 되야 겨우 하느님과 친구 맺기를 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우리를 직접 찾아와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친구를 맺자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은총과 축복이 또 다시 있을까 싶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 크신 하느님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와 인류 구원사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친구란 말처럼 듣기 좋고 편안한 단어가 다시 또 있을까요? 인디언들은 친구에 대한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로 유명합니다. ‘친구는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

여러 유명인사들 역시 각자 나름대로 친구에 대한 멋진 정의를 내렸습니다. ‘친구란 내 기쁨을 두 배로, 내 슬픔을 반으로 줄여주는 마술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하나 사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상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친구란 존재, 정말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고마운 사람입니다. 때로 가족에게 하지 못할 말들도 친구이기에 속 시원히 털어놓습니다. 매일의 삶이 지옥같을지라도 친구가 있기에 그래도 견디며 살아갑니다. 이 냉혹한 세상 친구마저 없다면 과연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하도 팍팍해지다보니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어집니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보다 더 나를 챙겨주는 친구,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갈 친구를 찾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는 게 점점 더 외로워집니다. ‘이 세상에 오직 나밖에 없구나!’하면서 홀로 쓸쓸히 돌아서서 눈물 흘립니다.

이런 우리들 앞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친히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