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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단 한 송이 꽃이지만 꽃이 죽지 않고 피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갸륵한 일인가?

5월 5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7~8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던 한국 수도회·수녀회들이 대부분 성소 급감과 회원들의 노령화로 인해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다들 암담한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며 과감한 가지치기를 통한 몸집 줄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기계로 찍어내듯 수많은 수도자들을 양산해내던 성소의 황금기가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이었던가? 라고 반문한다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수도생활이 소멸되어간다고 말하는 오늘 수도생활은 그 어느 순간보다 더 활발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수도생활은 새로운 에너지로 고동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시대는 외양과 활동에만 치중했던 지난 시절을 깊이 성찰하며, 수도생활의 깊은 내면과 핵심으로 들어가라고 수도자들을 초대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엄청난 수효의 수도자들보다 진짜 수도자 한명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수도생활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도, 부활의 영성도 아닌 성토요일의 영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혼란과 당혹스러움의 영성, 무기력과 무능함의 영성입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더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영성입니다.

언젠가 외국 출장 중에 누군가 사무실로 꽃을 보내왔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출장을 끝내고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화분 속의 꽃들이 거의 다 말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송이 꽃만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었습니다. 그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단 한 송이 꽃이지만 꽃이 죽지 않고 피어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갸륵한 일인가?’

대부분의 수도회·수녀회들이 갑작스레 닥쳐온 성소급감 현상으로 힘겨워하는 시대, 우리 가운데 단 한명의 수도자라도 활짝 꽃피어난다면, 그 향기를 만방에 퍼뜨린다면 이 얼마나 고맙고 갸륵한 일이겠습니까?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어떻게 해서든 ‘딱’ 붙어있는 일입니다. 그분 품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수도자·성직자를 포함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분께 ‘딱’ 붙어있으므로 인해 제 가치와 빛깔과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떨어져나온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17세기의 천재이자 ‘팡세’의 저자인 파스칼은 수학자이면서도 과학자였고, 또한 철학자였습니다. 파스칼은 그의 저서를 통해서 한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위대한가를 잘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위대한 순간은 하느님 안에 머무를 때, 그분께 딱 붙어 있을 때입니다.

팡세는 영원의 시각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비춰보았습니다. 무한 속에서 바라본 한 인간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하는 인간은 위대한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모르고 하느님을 알게 되면 그 인간은 즉시 오만함에 빠집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모르고 자신의 비참함을 알게 되면 즉시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철저하게도 숨어계십니다. 파스칼에 따르면 하느님은 부정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넘치고, 확신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영의 눈을 뜬 사람에게,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이룬 사람에게는 보이지만, 눈먼 자들에게는 절대로 나타내보이지 않으십니다. 이 납득할 수 없는 하느님의 처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신앙의 눈이 뜨이게 됩니다.

죄인인 인간은 티끌을 핥습니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은 고작 티끌 같은 쾌락을 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티끌 속에는 끝내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습니다. 무한한 공허 속에 숨어계시는 하느님, 미소함의 극단 앞에 서 있는 인간은 무한한 관대함의 주님 앞에 그저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 자신의 나약함과 비천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심연의 좌절과 무의미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해결책은 결국 하느님을 수용하는 일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